"정치·경제 선진국 중에 기소·수사권을 가진 검찰·경찰이 그 권한을 가지고 정치에 개입하고 정치에 영향을 주고 특정 정치세력 이익에 공모하는 나라는 없다. 이는 가장 심각한 국기 문란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당 대표 후보가 지난 3일 기자간담회에서 본인과 관련된 검찰과 경찰 수사에 대해 한 발언이다. 많은 언론은 이에 대해 이 후보 자신의 약점으로 꼽히는 '사법 리스크'를 여권의 '정치 보복'으로 규정하고 지지층을 결집시키겠다는 의도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 후보에 대한 검찰과 경찰의 수사가 본인 말대로 정치 개입이자 국기 문란인지, 아니면 이를 정치 보복으로 규정하여 역공을 취하려는 것인지는 주관적 해석의 영역에 속하는 일일 수 있다. 개인의 정치적 성향이나 진영에 따라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경향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는 시대 아닌가. 문제는 주관적 해석에 앞서 먼저 확정되어야 할 객관적인 사실관계도 아직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검찰이나 경찰이 수사 결과를 발표해도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그것조차 부인할 가능성이 높다.
현대사회를 흔히 '탈진실', 이른바 '포스트 트루스(post-truth) 사회'라 규정한다. 가짜 뉴스를 사실 보도로, 증거인멸을 증거보전으로, 범죄 수사를 정치 보복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진실이라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어디나 있게 마련이다. 설사 객관적 사실관계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차고 넘친다 해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맹목적 진영 논리에 매몰되지 않은 상식적인 국민은 수사기관이 발표하는 수사 결과를 신뢰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 사람들도 무엇이 사실관계에 부합하는지 알기 어렵도록, 그래서 진실이 무엇인지 판단하기 어렵도록 만들어 놓음으로써 나라 전체를 어지럽게 만든다면 그것이야말로 국기 문란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범죄를 수사하여 범죄자를 처벌하고 진실을 밝히는 게 임무인 수사기관들이 부실·늑장‧눈치 수사로 의혹을 증폭시키는 행위가 가장 심각한 국기 문란이라는 말이다.
이 후보를 대상으로 한 수사는 대장동·백현동 특혜 의혹, 변호사비 대납 의혹, 성남FC 후원금 의혹, 경기주택도시공사 합숙소 관련 의혹, 부인 김혜경 씨의 경기도 법인카드 유용 의혹 등 다수이다. 모두가 문재인 정권에서 시작된 수사지만 아직도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히 진상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사건에 대한 개인적 평가는 차치하고 객관적 사실을 알고 싶다는 국민의 요구를 감안할 때 수사기관의 존재 의미를 의심케 하는 작태가 아닐 수 없다. 지난 정부에서 정권의 눈치를 보고, 선거 결과를 기다려온 것 정도는 이해한다. 심지어 정권이 수사를 방해하는 일도 있었으니 제대로 수사를 못 했을 수도 있다. 지금은 눈치 볼 일도, 수사를 방해하는 세력도 없다. 국민은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려도 아무런 결과를 내놓지 못하는 수사기관을 이해하기 어려운 게 당연하다.
없는 죄를 만들거나 유죄로 결론을 유도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혐의가 없다면 이를 밝혀 당사자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도 수사기관의 임무이다. 사실관계가 복잡하고 증거 수집에 어려움이 있는 사건이야 그렇다 치자. 경기도 법인카드 유용 의혹은 사실 단순한 사건이다. 경찰 스스로 지난 7월 20일 "8월 중순 수사 결과를 발표하겠다"고 발표한 바도 있다. 당사자인 경기도 7급 공무원 A씨가 관련 녹취를 폭로한 게 지난 2월, 대선 후 경기도청과 법인카드 사용처 등을 압수수색한 4월도 한참 지났다. 이제야 이 후보 부인 김 씨를 소환했음에도 변호사 선임을 이유로 조사 날짜를 미루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경찰이 공언한 8월 중순이 지났지만 신임 윤희근 경찰청장은 "공소시효에 지장이 없도록 마무리하겠다"는 말을 하고 있다. 도대체 증거가 차고 넘치는 이런 간단한 사건조차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9월 9일 공소시효를 걱정하고 있다는 말인가. 이 후보 말대로 정치‧경제 선진국 중에 이런 나라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수사 능력이 부족해서인지, 과도한 눈치 보기 때문인지, 일선 수사진이 게으르기 때문인지 철저한 분석부터 필요해 보인다. 다시 말하지만 수사기관의 부실‧늑장‧눈치 수사는 단순한 무능이나 직무 유기가 아니다. 그 자체가 바로 국기 문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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