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 북쪽에 위치한 군위는 팔공산과 아미산 등 많은 명산을 품고 있는 지역이다.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삼국유사』의 얼이 서려있는 고장이며, 대구·경북 통합신공항 이전지로 지정되어 앞으로 많은 발전이 기대되는 지역이다.
국도 5호선을 타고 군위읍을 지나 의성 방면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에 길게 늘어선 서기 어린 산이 눈에 들어온다. 이 산이 성대산(城垈山)이다. 형상으로는 저울대이다.
저울대란 요즈음에는 전자저울이 개발되어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과거에는 물건의 무게를 측정할 때 항시 사용하던 도구이다. 저울에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공정, 균형의 의미가 담겨있다. '균형'이란 '어느 한 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고른 상태'를 뜻한다. 이런 공정의 의미로 대법원 청사에 있는 조형물 '정의의 여신상'은 오른손에 저울을, 왼손에는 법전을 들고 있다.

◆저울대 형상에서 파생된 지명
성대산처럼 저울대 형상에서 파생된 지명을 알아보자. 저울대 형상을 기준으로 군위읍 '정리(政里)'의 '정(政)'은 '바루다(正)'라는 뜻이 있으니 저울과 연관이 있는 지명이다. 저울에 달 물건이 안쪽에 있다는 의미의 '내량(內量)', 저울에 달 물건이 바깥쪽에 있다는 의미의 '외량(外量)'도 있다.
저울에 무게를 달 곡식의 의미인 오곡(五穀)도 같은 맥락의 지명이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내량(內良)', '외량(外良)'의 '량'은 '조선조 이 마을에서 과거에 급제한 인물이 많이 나왔으며, 어진 선비를 많이 배출했다고 해서 '어르실'이라 부르게 되었다하며, 그로인해 한자로 수량 '량(量)'이 어질 '량(良)'자로 변경된 것으로 보인다.
예천군 호명면 광석산이 또 하나의 저울대 형상이다. 이 형상에서 파생된 지명이 형호(衡湖)인데, 여기에서 '형'은 한자로 저울대 '형(衡)'이다. 인근 직산(稷山)은 저울대에 무게를 다는 곡식(기장)을 뜻한다. 또 인근에는 우리말 지명인 저우리도 있다.
'내 마음은 저울과 같다'는 뜻으로 아심여칭(我心如秤)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이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공평무사(公平無私)한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이 저울대 주산의 정기를 받아 출생한 인물 중 이 사자성어에 가장 어울리는 대표적 인물들이 있다.


◆ 류성룡 조부 류공작과 연안 이씨 선영
성대산에서 서쪽 소보 방향으로 3㎞ 정도 가면 구니CC 가 나온다. 이 골프장 정문 앞쪽 산록에는 선조 때의 명재상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 선생의 조부인 간성 군수를 지낸 류공작(柳公綽, 1481~1559)의 묘소가 있다. 묘소 북편에는 갑산 교수(敎授)를 역임한 연안 이씨(延安 李氏) 군위 입향조 이형례(李亨禮, 1448~1507)의 묘소와 선영이 있다. 이 산이 다섯 손가락의 형상 오지산(五指山)으로, 류공작 묘소는 검지 부분에 용사(用事)되어 있다.
『군위군지』에는 '딸년 도둑년'의 오지산 전설이 실려 있다. 군위읍 솔티 마을(외량 리)에서 살았던 류공작은 농바우(대흥리) 이형례의 따님에게 장가를 갔다. 어느 날 연안 이씨 조모가 과객이 전하는 말을 들었다. 친정의 산소 자리가 정승이 나올 명당이라는 걸 알았다. 나중에 친정 조부가 돌아가시자 묘택으로 정하여 파 놓은 자리에 밤새도록 물을 길어서 부었다.
결국에는 그 옆자리에 묏자리를 쓰게 되니 이곳이 연안 이씨 문중 묘가 된다. 그 뒤 친정 오라비에게 부탁하여 그 물이 나오는 산소를 얻어 자신들의 신후지지(身後之地, 살아 있을 때 미리 잡아 둔 묏자리)를 마련한다. 서애 선생 조모가 35세에 먼저 세상을 뜨자 그 자리에 쓰고, 뒤에 조부가 묻혀 오늘의 풍산 류씨(豊山 柳氏) 묏자리가 된다. 그 풍수의 말이 정말인지 예언처럼 서애 선생은 정승에 올랐다.
연안 이씨 집안에서도 조선전기 황해도 관찰사, 함경도 관찰사, 예조참판을 역임한 수졸재(守拙齋) 이우민(李友閔, 1515~1574)), 임진왜란 당시에 대제학과 의정부 좌찬성을 지낸 대문장가 오봉(五峰) 이호민(李好閔, 1553~1634))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이러한 것을 보면 이 오지산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다. 아래에서 보면 그냥 야트막한 산으로 보이지만 막상 현장에 올라가 보면 풍수적으로 자리가 대단함을 느낄 수 있다. 류공작의 묘소는 한쪽으로 치우친 감은 있지만 천하의 대명당이다. 과일이 나뭇가지 끝에 달리듯 혈처도 이런 나지막한 산록에 많이 맺힌다.

이 묘소 인근에는 류성룡 선생이 후학을 위하여 설립한 '남계서원(서당에서 서원으로 승격되어 류성룡, 이호민 선생의 위패를 봉안)', 류성룡 선생의 제자 서담(西潭) 홍위(洪瑋, 1559~1624)가 지은 글방 '칠탄숙(七灘塾)' 강당이 있다.
류성룡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저술가이다. 호는 서애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柳仲郢)의 차남으로 임진왜란으로 패망의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해낸 명재상이자 정치·학문적으로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전란 중 군무(軍務)를 총괄하는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직책을 맡아 민심을 달래고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그는 온건과 타협의 자세로 당파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끝까지 시무(時務)에 맞는 정책을 펼친 대가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비난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편만을 두둔하지 않았고 민중의 고통을 살폈으며, 청렴한 삶으로 부정을 멀리한 재상으로 역사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이러한 기질은 조부모 묘소의 주산 저울대의 영향일 것이다. 풍수에서 혈처(穴處)의 기운은 주산을 통해서 오며, 산의 형상과 성격이 혈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겪은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하였다. 징비는 '전에 있었던 잘못과 비리를 경계해 삼간다'는 의미이다. 이 책은 현재 대한민국 국보 제132호이다.

◆정3리 마을과 이순진 전 합참의장
이 저울대산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정3리 마을에서 또 한사람의 걸출한 인물이 태어난다. 바로 대한민국 최초 육군3사관학교 출신으로 제39대 합동참모의장을 역임한 예비역 육군대장 이순진 장군이다. 이 장군은 1954년 10월 3일 영천 이씨(永川 李氏) 집성촌인 이곳에서 출생하였다. 마을 뒤편 산은 나지막하게 보이나 바위로 뭉쳐져 있다. 인간은 자연을 닮아 간다. 체격은 작지만 바위같이 단단한 이 장군의 모습과 흡사하다.
지난 주 생가 터를 확인하기 위하여 마을을 방문할 당시 마을 앞 고속도로 다리 밑에 마을 어르신 몇 분이 계셨다. 이 어르신들의 전언에 의하면 이 장군은 어릴 때부터 친구들과 놀 때도 항상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녔으며 학구열이 남달랐다고 한다. 이 장군은 사단장, 군단장, 작전사령관으로 재직 시 고생하는 장병들을 격려하고 진심어린 마음으로 대해준 여러 유명 일화는 지금까지도 전해온다.
이처럼 사병들에겐 한없이 인자했고, 작전을 책임지는 휘하 참모들에게는 엄격했다. 이러한 투철한 국가관과 공사를 구분하는 엄정한 기질은 '공정과 균형'을 상징하는 저울대 산의 기상일 것이다.

이 장군의 생가 터는 좋은 집터이나 오래전에 매각이 되어 현재는 밭으로 활용하고 있다. 조부, 부친 묘소는 이 마을 뒷산 산록에 있는데 대 명당이기는 하나 재혈(裁穴, 기가 응결된 곳을 정확히 짚어내는 행위)과 좌향(묘소의 방향)이 아쉽다. 이 장군이 비주류에 진급이 늦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동쪽 '을(乙)' 방위에 한 '일(━)' 자 모양의 산형이다.
이를 풍수에서는 '일자문성'이라 하며 일명 '군왕사(君王砂)'라고 한다. 이러한 산 형상은 우두머리가 될 수 있는 기운을 가지고 있다. 합참의장이 된 해가 바로 2015년 을미년(乙未年)이다. 42년간 군 복무를 하면서 마침내 제복 군인의 최선임 자리에 오른 것은 바로 저울대산을 바라보는 고향의 생가 터와 선영의 정기가 어우러져 이루어낸 결정체라 아니할 수 없다.
'공정과 균형, 지도자가 지켜야 할 덕목이다.'

노인영 풍수사·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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