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춘추칼럼] 위기의 여름

심윤경 소설가

심윤경 소설가
심윤경 소설가

그날 나는 여행 가방을 사야 한다고 마음먹은 참이었다. 여행을 자주 다니지도 않으므로 중고 물건이면 충분했다. 원하는 브랜드, 원하는 크기의 중고 여행 가방이 강남 어디쯤에 마침 있었고 게다가 거래 장소 바로 근처에 절친이 살고 있었다. 여행 가방을 사러 가는 길에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면 딱 알맞을 것 같았다. 나는 친구에게 메신저를 보내 다음 날 만날 약속을 정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의 만남이 일사천리로 성사되는가 싶었다. 친구의 집으로 갈지 가까운 음식점에서 만날지 의논하던 중에, 친구가 갑자기 양해를 구했다.

"잠시 후에 다시 연락할게. 주차장이 침수될 것 같다고, 차를 옮겨 놓으라고 하네."

여러 날 뉴스를 장식했던 침수 대란의 시작이었다. 친구는 아파트를 둘러싸고 버려진 차들이 둥둥 떠 있는 현장 사진들을 여러 장 보내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중고 거래는 취소되었다.

기후위기는 더 이상 미래 공포가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저작으로 '총, 균, 쇠'가 가장 유명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문명의 붕괴'다. 이스터 섬, 중미 마야 문명, 노르웨이령 그린란드 같은 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루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탁월한 해박함과 통찰력으로, 번성하던 문명이 어느 날 붕괴하고 폐허로만 남게 된 수많은 예들을 분석하여 그것이 무분별한 자원 오남용으로 인한 환경오염, 그리고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편견 때문이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린란드에 한때 번성했던 사람들은 대기근 이후 집단 아사했다. 지력이 약한 땅에서 무리하게 축산업과 농업을 고집한 것도 어리석었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물고기를 먹지 않았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곳은 지구상에서 가장 수산 자원이 풍부한 지역이다. 바다와 강과 호수에 들끓는 연어와 대구와 넙치를 그대로 놔두고 그들은 굶어 죽었다. 말 그대로 '죽도록 어리석'었던 것인데, 아마도 그들은 우글거리는 물고기를 볼 때 우리가 '곤충식량자원'을 대하는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듯하다.

현대 인류는 마야인이나 그린란드인보다 나아졌을까?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문명의 붕괴'로 인류에게 경고를 남긴 이후 세상에는 가상화폐 채굴이라는 새로운 붐이 일어났다. 채굴은 컴퓨터가 단순 연산을 무한히 반복한 포상으로 코인을 얻고 그 과정에 화석연료 에너지를 고래처럼 소모하는 황당한 산업이다. 많은 사람들이 환경을 위해 낡은 제품들을 오래오래 사용하려 노력하고 심지어 화장실에서 휴지를 몇 칸 쓸까 고민하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인류는 반성하고 고치기는커녕 새로운 어리석음을 끝없이 창조하고 있다.

재난은 가난한 자부터 집어삼킨다고 하는데 그렇게 보면 우리의 재난은 이미 중등도 이상으로 심화된 것이 분명하다. 아프리카와 동태평양의 저소득 국가들이 겪던 기후위기는 이 여름 산업혁명의 근원인 서유럽과 북미대륙의 선진국까지 눈에 보이게 확장되었다.

그동안 늘 그래왔듯이, 우리 보통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성실한, 그러나 근원적인 해답이 될 수는 없는 작은 실천들을 하면서 과학자들과 사업가들이 해결책을 찾아주기를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다. 내 실천으로 지구를 구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뭐라도 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방법을 찾아낼 때까지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중고 물품 거래는 총생산을 줄이므로 매우 쉽고 강력한 실천의 방법이 된다. 평소엔 가볼 일 없는 낯선 곳을 탐험하고, 타인의 취향을 엿보며, 짧고 친근한 대화를 나누는 재미있는 경험이 되기도 한다. 나는 아는 분 댁에서 극단적으로 아름다운 욕실을 만났다. 비누 한 개만 달랑 놓인 욕실이었다. 흔한 보디와 헤어 제품이 하나도 없는 욕실 풍경은 몹시 낯설었다. 손씻기와 세면, 머리 감기와 샤워까지 모두 같은 비누 하나로 해결한다고 했다. 어느 가게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제품이라서, 나는 돌아오는 길에 그 비누를 사들고 왔다. 머리를 감아보니 나쁘지 않았다. 비누나 중고 거래로 지구를 구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당장 뭐라도 하지 않고서는 두려움을 이길 수 없을 만큼 위기를 가깝게 느낀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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