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경규의 행복학교] 기적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최경규

새벽 5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선생님, 큰일 났어요" 떨리는 목소리, 수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느낌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그녀는 부산에 사는 30대 여성. 아직 만난 적은 없지만 내가 진행하는 온라인 수업을 신청한 학생이다. 그런 그가 이런 새벽에 전화한 것은 참으로 뜻밖이었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여 시간을 미처 보지 못하였던지, 어쩌면 시계 볼 여유조차 없었던 것 같다.

그녀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 보이스피싱에 대하여 다른 이들보다 더 잘 알고 있었지만, 정작 어머니께서 피해자가 된 것이었다. "마치 네 목소리처럼 들려서 시키는 대로 다 했어, 정말 너인 줄 알았다니까"라고 하시는 어머니에게 상상하지도 못할 일들이 벌어졌다.

불과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 뒤에, 통장에 있던 돈뿐만 아니라, 현금서비스, 대출통장까지 4개가 만들어졌다. 현재까지 확인되는 피해 금액만 천만 원이 넘어가는 그리고 문제는 앞으로 얼마만큼의 피해가 있을지에 대한 공포였다. 보이스피싱의 정교함으로 주말을 앞두고 벌어진 일이라 은행뿐 아니라 다른 기관에서의 움직임도 느릴 수밖에 없었다.

돈도 큰일이지만 문제는 공황상태에 있는 어머니였다. 밤새 우시며,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는 어머니를 두고 그녀는 아기들이 있는 집으로 차마 돌아가지 못하였다. 혹시라도 나쁜 생각을 하실지 몰라 어머님을 곁에서 지켜야만 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나에게 다이얼을 돌렸던 것이다.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가 아니라 그녀는 그 순간, 무엇이라도 붙잡고 싶었던 것 같다. 그녀는 마음이 숨 쉴 공간이 필요했다. 떨리는 목소리 사이로 내가 건네야 할 말은 무엇일까? 수많은 상담이론이 영화의 필름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비록 정답은 아니라 할지라도 무엇이라도 잡고 싶고 기대고 싶은 힘든 이들은 마음을 나누고픈 사람에게 말을 건넨다. 그러기에 누군가 힘들 때 너무 객관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절벽의 끝에 있는 사람, 위로를 듣겠다고 손을 내미는 사람을 더욱 궁지로 몰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힘들 때의 좋은 말은 길을 잃은 이에게는 어둠에서 나올 수 있는 동아줄과 같다.

세상에는 기적이라는 것도 있기에, 해결할 방법이 반드시 있을 거라는 말로 그녀를 안심시키었고, 어머니 곁에 있기를 부탁하였다. 그녀는 내가 말한 대로 어머니께도 하얀 거짓말을 조금 보태어 무사히 주말을 보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그녀에게서 다시 전화가 온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기적이 일어났어요, 경찰분들도 이런 경우는 잘 없다는데, 통장에 돈이 아직 모두 인출되지 않고, 일부만 인출되었다고 해요.

나머지는 차츰 해결하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그녀가 덧붙인 말, "돈도 돈이지만 선생님의 그 선한 말이 정말 기적을 일으킨 거 같아요, 말의 힘이 정말 있네요, 그리고 선한 거짓말은 진실이 되어 어머니를 살렸어요, 만약 그때 너무 현실적으로만 말했더라면, 생각하기도 끔찍하네요, 고맙습니다."

세상을 어느 정도 살아본 사람은 삶이 그리 대단한 것도 그리 복잡한 것도 아님을 안다. 그러기에 경험을 통해 정제된, 단순한 삶의 철학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의 가치를 지켜나간다. 이러한 행복의 논리를 잘 아는 사람조차도 시련이 닥칠 때면, 삶이 한 순간 복잡해진다. 단순함으로 가볍게 살아온 날들이 하루아침에 전쟁터로 변한다.

◆진심이 담긴 말에는 희망의 씨앗이

여름철 잘 익은 수박 표면처럼, 삶을 겉으로만 보면 모든 이들이 편하게 살아가는 듯 보인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걱정 없는 사람은 없고, 시련 없이 삶을 마감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을 뜻하는 한문, 사람 인(人)자를 보면 마치 두 나뭇가지가 서로 의지하며 서 있는 듯 보인다. 어느 하나가 너무 많이 기울면 제대로 균형을 잡지 못하고 쓰러질 것이다. 그러기에 삶. 그 자체는 균형을 맞추며 하루하루 이어나가는 묵언 수행일지 모른다.

서로 기댈 수 있으려면,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도 심(心), 평온을 찾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따스한 말이다. 박노해 시인이 '말의 힘이 삶의 힘'이라고 한 것처럼, 희망이 있으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사람은 살아갈 수 있다. 그렇다면 희망. 무엇으로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해본다. 멋있는 식당에서 따뜻한 식사 한 끼, 저녁 해 질 무렵 막걸리 한잔 모두 좋지만, 희망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진심이 담긴 말에는 희망의 씨앗이 숨겨 있다. 그래서 말에 혼을 담고 믿음으로 포장해 준다면 힘든 이의 어깨는 어제보다 더 가벼워질 수 있다. 비 오는 저녁, 내리는 빗소리에 자신의 울음을 묻어보려는 이가 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슬픔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들은 조용히 눈물을 빗소리와 함께 흘려보낸다. 그들의 가슴은 구멍이 뚫려 있다.

마치 구멍 난 하늘, 그치지 않는 비처럼 말이다. 그런 그들이 혹시라도 곁에 있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이제부터 시작이야"라는 객관적인 말이 아니라, "잘 될 거야, 내가 기도해줄게, 언제라도 필요하면 연락해"라는 짧지만 따스한 말이다.

신(信)은 인(人)자에 말씀 언(言)이 합쳐진 글자이다. 사람이 하는 말에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믿어주고 기다려줄 거라는 믿음, 그 믿음이 희망이 되고, 힘든 이들에게는 최고의 선물이 된다.

가을이 시작되는 아침, 공기가 시원해지고 있다. 지난여름 무더웠던 기억도 지나가는 추억으로 넘어가고 있다. 보이스피싱으로 힘들었던 순간 슬기롭게 잘 이겨낸 선생님을 응원하며, 그에게 이렇게 전하고 싶다.

"세상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지금 우리가 판단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일은 때가 되어 열리는 열매와 같은 법, 우리가 온도를 조절할 수도, 내리는 빗물을 맞추기도 어려운 법이지요,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니 오늘 평온하게 하루를 맞이하고, 잘 보내주세요, 그러다 보면 또 웃을 날이 다가올 거니까요"

최경규

최경규 심리상담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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