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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들려주는 클래식] <6>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서영처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

베토벤. 매일신문DB
베토벤. 매일신문DB
서영처 계명대 교수
서영처 계명대 교수

베토벤(1770~1827)의 피아노 소나타 '월광'은 달밤의 정경을 서정적으로 그린다. '월광'은 베토벤이 가장 불우했던 시절의 작품으로 1악장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는 널리 알려진 악장이다. 1801년 베토벤은 제자 줄리에타 귀차르디에게 이 곡을 헌정한다. 불멸의 연인으로 추정되는 줄리에타는 이후 젊고 부유한 백작과 결혼한다. 가난하고 귀가 먹은 데다 조화를 잃은 성격의 음악가가 귀족 여성과 결혼한다는 것은 당시로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연인 줄리에타조차도 베토벤의 무모하고 폭발적인 사랑에 대해 여러모로 부담이 컸을지 모른다.

베토벤은 비관하여 빈 교외의 하일리겐슈타트로 가서 유서를 쓴다. 1802년 32세 때의 일이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 울부짖던 베토벤은 죽음의 유혹을 떨쳐내고 빈으로 돌아온다. 완전히 귀가 먹게 된 그는 오히려 생애 최고 역작들을 생산해 낸다. 심연에서의 울부짖음은 자기 갱신을 알리는 신호였으며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이 사건 후 그는 숭고한 이상과 엄숙한 도덕성, 강렬한 의지로 만들어진 '걸작의 숲'이라 불리는 시기를 이루어간다.

'월광'은 사색의 깊이에 도달한 베토벤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곡이다. 환상과 서정성, 격정을 고루 갖췄다. 게리 올드만이 주연한 영화 '불멸의 연인'을 보면 아무도 없는 어두컴컴한 살롱에서 베토벤은 '월광'을 연주한다. 귀가 먹어가는 그는 소리를 들으려 피아노에 귀를 갖다 대지만 해머가 두드리는 현의 진동만 느낄 뿐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다. 하지만 베토벤에게는 듣는 것 자체가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그 자신 피아노의 일부가 되어 마음으로 더 완전하게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천사, 나의 모든 것, 나 자신이여. (중략) 왜 이토록 깊은 슬픔이 밀려드는지. 우리 사랑은 희생과 단념 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오? 그대가 온전히 내 사람이 아니고 나 또한 온전히 그대의 사람이 아닌 사실을 바꿀 수 없는 것이오? (중략) 나는 결심했소. 그대 품에 안겨 내 영혼을 정령의 세계로 떠나보낼 수 있을 때까지, 그날이 아무리 멀다 해도 방황을 멈추지 않겠소. (중략) 오늘도 내일도 그대, 그대, 그대를 향한 눈물겨운 동경, 내 생명, 내 모든 것이여."('불멸의 연인에게' 중에서)

청력의 상실은 베토벤에게 대인 기피와 같은 여러 측면의 인간적 불화를 일으켰지만 예술에 있어서는 정신적 깊이와 높은 이상을 실현시켰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대체로 예술가들의 불우함은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창작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그들은 미칠듯한 분노의 에너지를 쏟아 한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을 기어이 생산해 내고야 만다.

베토벤의 체험이 짙게 스며있어서일까. '월광'은 연주하는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고 승화시켜 주는 힘이 있다. 출렁거리는 달빛은 과거의 시간이며 추억과 회한의 시간이다. 추억이란 아름다운 순간을 반복해서 경험하는 일, 시간을 과거로 되돌려 우리를 영원한 사랑 속에 살게 한다. 달빛은 램프의 불빛처럼 부재중인 사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서영처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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