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현지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에미상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배우 이정재는 지난달 자신이 연출한 영화 '헌트'를 홍보하는 TV 방송에 출연하면서 연분홍색 재킷에 진주 목걸이 차림으로 나왔다. 당시 이정재는 이날 자신의 의상을 "청담동 사모님 느낌"이라고 소개했다.
지난 7월 1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앞. 박지현 전 더불어민주당 공동 비상대책위원장이 남색 정장에 넥타이를 하고 나타났다. 그는 이날 '출마자격 논란'에도 당 대표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이처럼 박 전 위원장은 공식석상에 항상 슈트 차림이다. 품이 넓고 라인이 들어가지 않은 남성적 스타일에 단색 넥타이를 매치한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패션에 대해 "여성 슈트는 활동하기 불편해서 남성 정장을 입는다"며 "남녀의 틀을 깨는 젠더리스 스타일을 추구한다"고 했다.
이제 '남자답다', '여성스럽다'와 같은 표현은 시대 흐름에 뒤처지는 말이 됐다. 최근 빅데이터 분석업체 다음소프트에 따르면 여성스러움과 남성스러움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언급한 수는 2014년 34만4천55건에서 2018년에는 14만4천521건으로 절반 이상 줄었다. 이에 반해 젠더리스 언급량은 같은 기간 700건에서 7만7천113건으로 100배 이상 대폭 증가했다.

이 같은 흐름에 따라 패션업계에서도 남성용·여성용 패션이라는 말이 퇴조하고 있다. 대신 수많은 패션 브랜드가 성별을 구분 짓지 않는 패션 아이템 '젠더리스 룩'을 선보이고 있다. 집단보다 개인의 개성과 취향을 중시하는 MZ세대(밀레니얼 세대+Z세대)에게 성별을 구분하지 않는 젠더리스 룩은 개성을 표현할 확고한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사각팬티 입는 여자…진주 목걸이 하는 남자
이렇듯 사회적 성별 구분이 희미해지면서 여성의 레이스나 벨벳, 진주 액세서리, 남성의 넥타이나 슈트, 드로즈처럼 남성 혹은 여성만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패션 아이템을 남녀가 모두 착용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당장 온라인 명품 플랫폼 트렌비의 올해 상반기(1∼6월) 남성 주얼리 매출액이 지난해 상반기 대비 133% 급증했다. 국내 주얼리 브랜드 먼데이에디션의 진주 목걸이는 남성 고객 구매 비율이 20%를 차지한다.
여성 액세서리의 '클래식'이나 다름없는 진주 목걸이가 이 같은 흐름은 SNS 해시태그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인스타그램에 '#남자진주목걸이' 혹은 '#남성진주목걸이' 같은 해시태그가 붙은 게시물이 530건이 넘는다. 성별 구분 없이 '#진주목걸이'로 검색해도 '인기게시물' 상단에는 남성이 진주 목걸이를 착용한 사진이 나올 정도다.
속옷 시장도 비슷하다. 일본 속옷 브랜드 '와코루'는 지난해 12월 꽃무늬 레이스를 소재로 한 남성 속옷 '레이스 복서'를 출시했는데 열흘 만에 3개월치 판매 목표량을 달성하며 매진을 기록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이 운영하는 '자주'는 지난해부터 여성용 사각팬티를 팔고 있다. 지난달엔 여성용 사각팬티 6종을 새로 출시했을 정도로 시장 반응도 올라왔다. 여성들이 코로나19로 재택근무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몸에 딱 달라붙는 하의 대신 품이 넉넉한 옷을 즐겨 입고 압박감 없는 편안한 속옷을 찾은 게 이유로 풀이된다.
여기에 팝스타 저스틴 비버의 패션으로 과거 남성들에게 유명세를 탄 일명 '히프 슬렁 룩'이 최근 여성들에게 힙하고 트렌디한 스타일로 인식되고 있다. 차이는 통이 큰 남성 팬츠의 허리 라인을 접어서 배와 속옷 로고 밴드를 노출하는 로라이즈 패션과 젠더리스 트렌드가 접목돼 탄생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유행에 올 상반기 캘빈클라인 언더웨어의 트렌비 내 매출 또한 전년 대비 34% 이상 증가했다.
반대로 몸에 딱 달라붙어 남성 소비자들에게 심리적 장벽이 높았던 레깅스는 남성에게로 확대되고 있다. 국내 1위 레깅스 업체 젝시믹스는 2분기 매출 528억원을 기록했는데 이 중 남성 레깅스·이너웨어 매출액이 109억원이었다. 또 다른 국내 레깅스 업체 안다르도 2분기에 남성 레깅스 매출만 102억원가량을 냈다.
심지어 1977년 출시된 1세대 여성복 브랜드 '스튜디오 톰보이'는 45년 만에 남성복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한다. 14일 대구 신세계백화점에 매장을 여는 등 올 하반기 롯데·신세계·현대백화점 등에 총 10개 남성 단독 매장을 열 계획이다. 2019년부터 여성복 매장에서 남성복 컬렉션을 일부 선보이는 태생적 한계에도 올 상반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85% 증가하는 등 좋은 반응을 얻어서다.

◆젠더리스, 패션 넘어 뷰티로 시장 확장
언뜻 젠더리스가 유니섹스와 무엇이 다른지 와닿지 않을 수 있다. 의미로만 보면 유니섹스와 젠더리스 모두 남녀 성별 구분을 짓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향점의 차이가 완전히 다른 결을 만들었다.
유니섹스 패션은 쉽게 말해 '공용'이다. 남성성이나 여성성을 없애 모두가 착용할 수 있게 했다. 그래서 남성과 여성이 입을 수 있도록 사이즈가 다양하고, 디자인은 오버 핏이 주를 이룬다. 아이템도 후드 티셔츠, 청바지 등에 국한한다. 그리고 암묵적으로 유니섹스 패션은 여성이 남성의 패션을 따라 하는 개념이 담겼다.
반면 젠더리스는 성 중립성을 지향한다. 이 때문에 젠더리스 패션은 남성성이나 여성성으로 인식되던 특징을 살리되 남녀 구분을 지우는데 그 방향성이 있다. 남자 옷과 여자 옷이라는 기존 패션 법칙을 따르지 않고 신체적 특징, 취향의 차이만 고려한다. 종전 패션과 비교하면 더욱 독특하고 과감한 시도를 한다.

그러다 보니 패션을 넘어 화장품 등 뷰티 영역까지 영역을 넓히는 중이다.
국내 메이크업 화장품 업체 라카는 립스틱·틴트·아이섀도 같은 제품 소개에 여성 모델과 남성 모델이 해당 제품을 바른 사진을 함께 올렸다. 과거에도 색조 화장품 브랜드 광고에 남성 모델이 등장하긴 했지만 불과 모델이 직접 제품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손에 들고 있거나, 여성이 바르는 모습을 지켜보는 정도.
여기에 라카에는 남성을 위한 색, 여성을 위한 색상이 따로 있지도 않은 게 특징이다. 향수의 젠더리스 바람을 이끌었던 바이레도 역시 젠더리스 메이크업 라인을 출시하며 성별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이러한 트렌드를 잘 보여주는 영역이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져 온 네일케어다. 최근 젤네일 업체 '오호라'는 세계적 남성복 디자이너 우영미와 함께 '오호라 × 우영미 젤 네일 캡슐 컬렉션'을 선보였다. 남성 고객을 위해 붙이는 젤네일을 내놓은 것이다.
앞서 영국 가수 해리 스타일스도 젠더리스 네일 브랜드인 '플리징'을 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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