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인이 들려주는 클래식] <7>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

벨라스케스
벨라스케스 '시녀들'(1656년, 캔버스에 유채, 318×276㎝)

화가 벨라스케스(199~1660)는 자신의 작품 '시녀들'에서 정작 그리고자 하는 모델은 숨겨두고 그들을 바라보는 화가와 관객을 그린다. 제목은 '시녀들'이지만 그림의 주인공은 시녀들이 아니다.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궁정 화가로 일하며 어린 공주 마르가리타가 성장해 가는 모습을 화폭에 담아왔다. 그러나 이 그림의 진짜 주인공은 공주가 아닌 펠리페 4세 국왕부처이다. 화가는 국왕부처를 그리고 있고 흰 드레스를 입은 마르가리타 공주와 시녀들이 이를 구경한다. 모델이 된 국왕 부부는 관객들의 뒤쪽 작은 거울에 나란히 비춰져 있다. 여기서 우리는 화가와 공주를 비추는 또 하나의 거울을 파악하게 된다. 화가는 거울을 이용해 화면 밖의 세계를 그림 속으로 끌어와 거울에 의해 무한하게 확장되는 공간을 보여준다.

라벨(1875~1937)은 1899년 파리 음악원 재학 중 벨라스케스의 이 그림에 영감을 받아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을 작곡했다. 공주는 국왕 부부의 유일한 자식이었다. 그녀는 신성로마제국의 레오폴드 1세와 결혼하지만 22세의 나이로 아이를 낳다가 죽는다. 라벨은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통해 유리 온실 속 같은 왕녀의 짧은 삶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인상파 음악가들이 대상이 주는 뉘앙스에 민감하듯이, 라벨은 그림 속에 박제된 왕녀의 생에서 얻은 심정을 어두운 음악적 마티에르로 표현했다.

파반은 16세기 스페인에서 발생한 느린 궁중 무곡이다. 많은 작곡가들이 작품을 남겼지만 라벨의 것이 가장 유명하다. 이 곡은 우아하면서도 센티멘털한 라벨의 초기 대표작이다. 라벨은 바로크 스타일의 무곡을 사용하여 고전적 형식과 구성을 존중하는 그만의 음악적 특징을 들려준다. 주제 선율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변주된다. 관객은 출렁거리는 음악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아련함 속에서 흔들리면 된다.

관현악의 마법사답게 라벨은 원곡인 피아노곡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해 예술적 가치를 더욱 높였다. 우리가 듣는 대부분의 곡들은 관현악 편곡이다. 장중하고 느리게 이어지는 선율은 죽음을 어둡지만 화려하게 그린다. 또 죽음이라는 주제를 춤곡 위에 올려놓았다는 사실이 라벨의 남다른 미학을 보여준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은 벗겨진 수은 사이로 해묵은 기억들을 불러내는 음악이다. 담담하면서도 미묘하고 종잡을 수 없는 슬픔을 들려준다. 이른 죽음을 맞이한 왕녀를 기리는 음악을 듣다 보면 나른한 천국일 것 같은 왕녀의 삶도 생로병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통감한다. 어쩌면 왕녀의 삶이란 현실의 삶이라기보다 거울 속의 삶 같은 것이 아닐까. 벨라스케스와 라벨이 여기에 주목했다.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엘리스'는 거울이라는 장치를 통해 엘리스를 낯선 나라로 데려간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에서도 괴신사가 리허설을 마치고 온 크리스틴을 분장실의 거울을 통해 지하로 납치한다.

라벨의 음악은 낡은 거울 속 같은 모호한 공간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그리고 추억이 되어버린 옛 슬픔을 매우 시각적으로 펼쳐 보여준다.

서영처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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