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품위 있는 죽음

이장훈 경북대병원 순환기내과 교수
이장훈 경북대병원 순환기내과 교수

나이 지긋한 할머니께서 진료를 마치고 자리를 일어나시다가 뭔가 생각이 난 듯 물었다. "그 뭐냐 나는 나이가 많아 이제 더는 사는 게 힘들 것 같은데 그거 신청하는 거 어떻게 합니까?" 나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짐작이 갔지만 애써 모르는 척하였다. 아마 환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방법을 문의하신 것 같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란 자신의 연명의료 중단 등 결정 및 호스피스에 관한 의사를 직접 문서로 미리 작성해 두는 것을 말한다. 연명의료결정법은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에 대하여 연명 의료의 시행이나 중단 여부를 '환자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하여 '품위 있는 죽음'을 보장하는 제도를 말한다. 하지만, 비록 고령이라 하더라도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사망하실 뻔한 환자를 응급시술로 살려내고 지금까지 건강을 지켜내고 있는 심장내과 의사의 입장에서 연명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문서를 작성하도록 안내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연명의료결정법이 2018년부터 시행되어 4년째가 되고 있으나 의료 현장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우선 의료계의 입장에서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를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전문가 위원회에서 결정한다고 되어있지만 전문가들의 의견이 모두 일치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인 문제로는 환자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경우라도 응급실을 방문하였을 때 환자가 의식이 없다면 사전의향서를 작성하였는지 여부를 바로 알 수가 없어 원치 않는 심폐소생술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사전 의향서를 작성한 사실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응급치료를 통해 소생할 수 있는 상태라면 '임종과정'으로 볼 수 없어 적극적인 치료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보호자가 환자의 뜻에 따라 치료를 중단해 줄 것을 요구한다면 응급상황에서 요구를 들어줄 수 없어 분쟁이 불가피하다. 이는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라는 의학적 판단은 전문가인 의사에게 맡기면서도 '죽음에 대한 자기 결정권'은 환자의 권리로 보호해 주도록 하고 있어 발생하는 본질적인 문제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6월 발의 된 '조력존엄사법'은 더 큰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조력존엄사는 소생 가망이 없는 말기 환자가, 의사에 의해 처방된 약물을 직접 복용 또는 투약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연명의료결정법'의 개정안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환자에게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자기결정권을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의료계는 이 법이 '의사의 자살조력을 법으로 허용'하고 있는 '의사조력자살법'이 아니냐며 반발하고 있다. 이 법은 80%가 넘는 국민이 국민조력존엄사법을 찬성했다는 인식조사 결과를 발의 근거로 들고 있다. 하지만, 존엄한 죽음을 위한 정책 우선순위를 조사한 결과에서는 13.6%만이 의사조력자살 합법화를 찬성하였고 대부분은 간병지원체계, 의료비 지원, 호스피스 완화의료 확충 등을 더욱 시급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조력존엄사법' 논쟁의 핵심은 '환자의 자기 결정권'을 어디까지 보장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보다는 '죽음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공감대를 이루고 있느냐?'는 것으로 보인다. 안락사를 인정하고 있는 일부 국가들의 경우 '죽음은 노화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라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 되어있다. '품위 있는 죽음'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위해서는 회복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개인이 끝도 없는 간병으로 정신적, 경제적으로 지쳐 '의사조력자살법'과 같은 법에 의해 아무도 모르게 삶을 마감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떳떳하게' 삶을 마감할 수 있도록 법보다 먼저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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