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아 땅 옛 성터에 우뚝 히 솟아.'
포항 청하초등학교 교가의 한 대목처럼 이 학교는 조선시대 건립된 '청하읍성' 성터 위에 지어졌다. 세종대왕은 1427년 청하면 일대에 석성을 쌓도록 했는데,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성의 규모는 둘레는 약 410m, 높이는 약 2.73m로 전해진다. 청하초 둘레에서 성벽과 성터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해아는 신라 경덕왕 때 잠시 불렸던 청하면의 다른 이름 해아현이다.
겸재 정선이 1676년~1759년 청하면(당시 청하현) 현감으로 있을 당시 그린 청하성읍도에서도 성터가 잘 나타나 있다.
나라의 주요 거점이었던 곳에 세워진 학교이다 보니 설립 목적 자체도 남달랐다.
1910년 6월 천일사립학교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이 학교는 지역 4대 향교 중 하나인 청하향교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특히 '개화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이 개교의 목적이었다. 국어, 산술, 일어, 한문, 지리 등 10개 과목 수업이 이뤄졌다. 청하 군민 공유의 재산 수익금으로 학교가 유지됐다고 전해진다.
일제가 사립학교를 금지하면서 공립으로 바뀌는 등 탄압을 받았지만 정신은 끊어지지 않았다.
'청하장터 3·1 만세운동'이 이를 보여준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으로 촉발된 독립만세 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갈 때 청하면에서도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일었다.
6·25 전쟁이 일어난 1950년 이후 전쟁이 멈추기까지 3년간 학교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학교 건물이 폭격으로 소실돼 야외나 인근 향교 등에서 수업을 이어가야 했다.
그럼에도 교사와 학생들은 손수 흙, 돌, 짚, 물을 날라 발로 섞어 밟고 손으로 이겨 담을 만든 보리이삭 교실을 세우며 배움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
선배들의 피땀으로 다져진 터 위에서 배출된 졸업생은 올해 2월까지 7천874명이다. 학교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는 1962년으로, 당시 27학급에 1천842명이 재학했다.
현재는 7학급에 재학생 61명이 다니는 작은 학교가 됐지만, 교육열만큼은 전혀 줄지 않았다.
김형만 교장은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청하지역의 명문학교로서 해마다 더 나은 배움의 요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며 "학생이 올바른 품성을 갖고 각자의 꿈을 향해 도전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통해 지원하고 있다"고 했다.
학교에선 '배움이 즐겁고 나눔이 행복한 청하인이 되자'는 교육 목표 아래 학생이 즐거운 교실, 교사가 보람찬 교단, 학부모와 지역 사회가 함께 참여하는 교육이 실천되고 있다.
소통, 나눔, 기쁨의 첫 글자를 딴 '소나기 꿈 프로젝트'는 이 학교만의 특색을 잘 나타낸다.
학교와 학부모, 학생이 소통하는 환경을 조성하고 이를 토대로 교과교육과 창의적인 체험활동은 물론 방과 후 교육시간도 알차게 보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여기에다 생태체험, 야생화 화단, 메이커 공작실 등 다양한 체험 위주의 활동이 잘 짜여 있다.
고(故)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37회 졸업)는 생전 청하초 100년사를 축하하면서 "우리 선후배들이 전국 각지와 세계를 누비며 훌륭한 업적을 쌓고 있는 것을 볼 때 우리 청하초등의 100년 역사가 얼마나 자랑스러운 역사인가 자부심과 긍지를 느낀다"며 "역사와 전통을 토대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나갈 우리의 미래는 더욱 밝게 펼쳐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종린 전 포항시의원(47회 졸업)은 "임진왜란 때 청하의병, 일제강점기 때 목숨 바친 청하 3·1 의거 의사들, 천재 법학자 김용규 박사, 불교 대종사 지관 총무원장 등 각계에서 청하인들이 배출됐다"며 "청하초등인의 긍지와 사명감이 미래의 100년으로 이어지길 희망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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