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원한을 가지고 태어났길래 지 애미애비 모두 잡아 묵나…"
풍비박산이 된 집과 목숨을 잃은 가족들. "모두 네가 액운을 타고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외조모의 비수는 곧 여든을 앞둔 최영진(78) 씨의 마음에 아직 꽂혀있다. 원망의 목소리는 여섯 살 때부터 들어왔지만, 사위와 딸 그리고 손녀까지 떠나 보내야했던 외조모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다.
그에겐 한평생 '빨갱이 가족'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이제 빨갱이 소리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식은땀이 난다. 그 뜻을 알지도 못할 나이부터 '빨갱이'라는 이웃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 꼬리표로 남은 가족들은 살기 위해 모두 흩어져야 했다.
지난 8월 서울 강동구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최영진 씨는 담담히 그날을 회상했다. 어느덧 거동마저 불편한 몸이 됐지만 기억은 생생하고 또렷했다. 1946년 10월의 대구였다.
◆대구 10월, 최무학 집안의 몰락
1946년 대구는 혼란의 시기를 겪었다. 해방 직후 미 군정이 친일 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 공출을 강압적으로 시행했다. 콜레라와 수해까지 덮치면서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였다. 식량 배급을 요구하는 군중들의 시위와 노동조합 파업이 이어졌다. 미 군정과 경찰이 노동자를 검거하면서 대규모 군중이 봉기한 10월 1일, '10월 항쟁'이 시작됐다.
영진 씨의 숙부인 최무학(당시 30세) 씨는 10월 항쟁 최선봉에 섰다. 대구의대(현 경북대 의대) 학생이었던 그는 1일 시위 중 사망한 노동자 시신을 앞세운 시위단에서 연설을 했다. 2일에는 군중을 이끌어갔다. 미 군정이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시위는 진압됐고, 무학 씨도 경찰에 붙잡혔다.
대가는 혹독했다. 무학 씨에겐 무기징역 선고가 내려졌다. 이어 가족들이 차례로 끌려갔다. 영진 씨의 아버지이자 무학 씨의 형인 최문학(당시 35세) 씨가 첫 번째 대상이었다. 의사였던 문학 씨는 달성군 화원에서 병원을 운영 중이었지만 '살인교사'라는 억울한 혐의가 내려졌다.
집은 풍비박산이 났다. 경찰은 문학 씨를 구둣발로 마구잡이로 내려친 뒤 끌고 갔다. 다음 날 무학 씨의 남동생이자 국방경비대 소속이었던 최윤학(당시 22세) 씨도 붙잡혀 무자비한 구타를 당했다. 면회를 다녀온 문학 씨의 아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많이 상했다"며 망연자실했다.
최 씨 가족은 달성 화원에서 중구 봉산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두 살이었던 영진 씨는 세상을 이해하기에 너무 어렸지만, 어머니가 늘 집을 자주 비우고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 늘 불안한 모습이었다고 회상했다.
영진 씨는 어머니와의 마지막 날을 절대 잊지 못한다. 연좌제는 영진 씨의 아버지와 숙부에서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쟁 발발 즈음 집에 경찰이 또 들이닥쳤다. 그들은 영진 씨의 외조모에게 도장을 찍으라며 서류를 내밀었고, 강요에 못 이겨 도장을 내줬다. 훗날 알게 된 그 서류는 보도연맹 가입문서였다.
며칠 뒤 집으로 찾아온 군인들은 영진 씨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잡고 땅바닥에 패대기치고는 부엌에서 장작개비를 가지고 와 잔인하게 때렸다. "선생님 살려달라"는 애원에 "내가 왜 네 선생님이냐, 빨갱이 같은 X아"라는 답이 돌아왔다. 영진 씨 어머니는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갔다. 이후 보도연맹 명단에 올라 '대구 가창골'에서 총살을 당했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이었다.
그게 영진 씨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영진 씨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너무 그리워 장롱서랍을 열어 어머니가 쓰던 빗이나 장신구를 꺼내 어머니의 체취를 맡았다.
영진 씨의 큰누나 최숙희(당시 나이 19세) 씨도 대구 10월 당시 학생으로 참가를 했다 표적이 되자 서울에 숨어 있다 체포 됐다.
◆버려진 야채껍질 주워 먹어…살기 위해 흩어진 가족
영진 씨가 취재진에 "우리 어머니 예쁘지예"하며 사진을 건넸다. 사진 속에는 말끔한 흰 저고리 차림의 여성이 단정한 머리를 한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다른 가족사진엔 영진 씨와 닮은 아버지 문학 씨와 가족들이 함께 오순도순 모여 있었다.
단란한 가족의 삶은 그날 이후 송두리째 뒤바뀌었다. 남은 형제자매(영진 씨는 6남매 중 막내)를 외조모가 돌봤지만 밥을 굶는 날이 많았다. 배고픔에 시장에 버려진 막걸리 찌꺼기를 주워 먹다 식중독에 걸리기도 했고, 가축사료에 쓰는 밀기울(밀에서 가루를 빼고 남은 찌꺼기)을 얻어 죽을 끓여 먹었다. 시장 바닥에 버려진 야채껍질로 배를 채우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한날은 영진 씨가 '사람이 일주일 동안 굶으면 죽는다'는 말을 듣고는, 형에게 "내일이면 죽겠네…"라고 했다. 굶은 지 6일 째 되던 날이었다. 형은 "물만 먹어도 일주일은 버틴다, 더 버텨보자 영진아"라고 했다. 형이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위로였다.
차라리 배고픔은 견딜만했다. 최 씨네를 무너지게 만든 건 수군거림과 손가락질이었다. 생존자체가 어려울 만큼 힘든 상황이었지만, 도움의 손길을 뻗기도 어려웠다. 어딜가든 가족들에겐 '최무학 조카, 빨갱이 자식'이라는 낙인이 따라왔다. 그렇게 남은 가족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었다.
영진 씨는 "그때만 생각하면 피를 토하는 심정이다. 배가 얼마나 고팠는지, 무당들이 굿 지내고 나면 밥이 남아 있는데 그거라도 먹으려고 숨어 있었다. 굶는 게 태반이었다. 최무학 조카라는 시선과 손가락질에 얼마나 주눅이 들었는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결국 가족은 살고자 뿔뿔이 흩어지기로 했다. 한국전쟁 후 영진 씨는 조부를 따라 경북 칠곡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형들은 생활이 어려워 스스로 고아원에 들어갔다. 칠곡에서 돌아온 영진 역시 형이 있는 보육원에서 지내다 울릉도와 부산 그리고 서울로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극심한 연좌제 트라우마…"빨리 진상규명해야"
어른이 된 영진 씨와 형제들은 '대구 10월'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누구 한 명 "말을 하지 말자"고 한 것도 아닌데 모두 맞춘 듯 입을 꾹 닫았다. 그만큼 형제자매 모두에게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이 큰 상처였다. 말할 수 없는 억울함과 미안함을 서로의 마음에 담아두었다.
한때는 행방불명된 가족에 대한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영진 씨는 아직 가족의 사망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숙부들, 큰 누나 등이 어디서 어떻게 사망을 했는지 알 길이 없어서다.
영진 씨는 "윤학 삼촌과 숙희 누님은 서울 서대문형무소, 문학 아버지는 전주형무소, 무학 삼촌은 대전형무소로 간 것으로만 안다. 그 이후 어떻게 사망했는지 알 수가 없다. 총살 당했다고 소문만 있던 어머니의 뼈 조각 하나도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정부의 빠른 진상규명을 바랐다. 지난 2005년 진실화해조사위원회 1기가 열리면서 조사 신청을 받았지만 최 씨는 선뜻 나서지 못했다. 하루 빨리 가족의 누명과 억울함을 풀고 싶었지만, 연좌제와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또 손가락질을 받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아픔을 토해내지 못하고 삼켰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기로 했다. 가족을 함께 기억하는 형제 모두 세상을 떠났고, 여든을 앞둔 영진 씨마저 없으면 '최무학 가족'의 상흔은 묻혀버린다.
최영진 씨는 "무학 삼촌은 정의감과 혈기에 가득한 젊은이었다. 시위에 참여했다고 모두 공산주의자인가. 순수한 열정을 알지도 못한 채 어떻게 빨갱이라는 프레임을 씌어 일가족 몰살을 시키느냐"며 "진상규명과 함께 연좌제로 잡혀간 억울한 가족들이 어떻게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밝혀야 한다. 이제 시간이 없다"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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