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 시월] 76년 전 대구의 그날…시민들의 피로 물든 '10월 항쟁'

1편 잊힌 역사, 끝나지 않은 상처
1946년 10월 1일 경찰 총격…노동자 사망 후 시위 번져
경북을 넘어 전국으로 확산…해방정국 최대의 사건
1946~1950년 사이 연좌와 보복으로 민간인 학살 이어져

시위 이틀째인 1946년 10월 2일 대구역네거리 서편, 태평로 삼국상회 부근에서 경찰이 엄폐물에 몸을 숨기고 있다. 맞은편 도로가에는 여러 명이 쓰러진 모습.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 10월항쟁유족회 제공.
'대구 시월'의 노동자 시위의 주무대가 됐던 대구역광장과 공회당(대구콘서트하우스), 태평로 일대의 현재 모습.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1946년 10월 2일 대구 시위에서 희생된 피살자.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10월항쟁유족회 제공.
시위 이틀째인 1946년 10월 2일 대구역네거리 서편, 태평로 삼국상회 부근에서 경찰이 엄폐물에 몸을 숨기고 있다. 맞은편 도로가에는 여러 명이 쓰러진 모습.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 10월항쟁유족회 제공.

'타다당!'

1946년 10월 1일 저녁 어스름. 총소리가 울렸다. 대구역 앞 노동자 1천여 명이 처우개선을 요구하던 시위현장에서였다. 경찰의 발포에 철도노동자가 숨졌다. 해방정국 최대의 사건이라고 불리는 '10월 항쟁'의 신호탄이었다.

대구의 시위와 봉기는 경북을 거쳐 전국으로 번졌다. 계엄령 이후 며칠 사이 대구경북에선 상황이 수습됐지만, 그해 연말까지 전국 73개 시군을 쉽쓸 만큼 대규모 사건이었다. 당시 대구경북에서만 7천500명이 검거됐다. 동학농민운동, 3.1운동에 버금갈 정도의 역사적 사건이다.

'대구 10월'의 영향은 한국전쟁 때까지 이어졌다. 경찰과 우익단체는 시위 참가자들을 체포하고 살해했다. 1946~1950년 사이 연좌와 보복으로 민간인 학살이 이뤄졌다. '시위 관련자'나 '빨갱이'라고 지목되면, 즉결처형이나 행방불명이 됐다.

대구 10월은 긴 시간 '폭동'으로 치부됐고, 2000년대 들어서야 '사건'으로 정부 차원의 조사가 일부 진행됐다. 이제는 '항쟁'으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억울한 죽음을 말할 증언자는 '역사의 망각' 속에 사라지고 있다.

매일신문은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때까지 지역의 민간인 희생자를 추적했다. 목격자와 유가족의 증언, 당시 기록, 연구자료 등을 통해 대구 시월의 배경과 원인, 의미를 다섯 편에 걸쳐 집중 조명한다. 증언자들이 밝힌 민간인 희생자들의 이야기가 그 시작이다.

1946년 10월 2일 대구 시위에서 희생된 피살자.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10월항쟁유족회 제공.

강신중=1914년생. 1950년과 1951년 사이 대구 집에서 경찰에게 연행. 면회 안 되고 연락 두절. 지금까지 생사 여부 모름. 수소문 결과, 가창골로 끌려가 학살된 것으로 추정. 진상규명 안됨. 아들 강호재 씨 증언.

김복환=1931년생 추정. 청송 거주. 17살이던 1948년 4월 군자원입대 후 4개월 만에 탈영. 징역 5년형 선고. 1950년 사망. 시신 수습 못하고, 제4대 국회 '양민 학살 보고서' 명단에 이름 올라가. 막내 동생 김주환 씨 증언. 2006년부터 기록 찾기 시작.

남호진=생년 미상. 1950년 6월 농사일 마치고 집으로 왔을 때 경찰이 포박. 경찰서로 끌려갔고, 이후 청도 곰티재에서 사망. 남 씨가 손가락에 끼고 있었던 골무를 단서로 시신 찾음. 아내 혼자 농사를 지어 네 남매를 먹여살림. 유복자 남영태 씨 증언.

도달환=1907년생. 와세다대에서 유학한 지식인. 일제시대 독립운동하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조사 받은 기록 있음. 1949년 10월 경찰에 끌려가 대구형무소 수감. 군사재판에서 이적행위죄로 사형집행됐다는 신문 보도. 손자 도철호 씨 증언.

류삼봉=1913~1914년생 추정. 1950년 6월(음력) 군위 소보 일대에서 학살 추정. 보도연맹 관련자라고 불러 경찰서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음. 실종 이후 가족들 모진 고생. 큰 누나는 식모살이와 아들은 머슴살이를 하며 생존. 아들 류상열 씨 증언.

박영우=1917년생. 좌익 가담을 권하는 친구들을 피해 1948년 말쯤 청도에서 대구로 주거지를 옮겨. 이듬해 11월 집에서 식사도중 연행. 총살당한 것으로 추정. 73년이 흐른 현재도 시신을 찾지 못함. 딸인 박서현 씨 증언.

박재천=1920년생. 1949년 사망 추정. 독립운동 이력과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경북도청에 근무. 대구에서 아침 출근길에 정체 모를 사람이 붙잡아간 뒤 소식을 모름. 1968년 사망 신고. 올해 초 가창골 희생자 위령탑에서 이름 확인. 딸 박손희 씨 증언

박진=1928년생. 3세부터 일본에서 살다가 해방 이후 1946년 의성으로 귀국. 1949년 말쯤 한국어가 서툰 박 씨에게 지인이 보도연맹 가입 설득해 이름 적어 냄. 이듬해 7월 파출소로 끌려갔다가 총살된 것으로 추정. 아내 손조이 씨 증언.

박찬종=1924년생. 경북 청도 거주. 1950년 7월(음력)에 사망. 한국전쟁 직후 보도연맹 소집 연락을 받고 경찰서로 간 뒤 승학골(청도읍 사촌2리 일원)에서 총살. 지인 권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한 것으로 알려져. 아버지가 시신 수습. 손자 박준용 씨 증언

배개발(배동발)=1911년생. 1946년 10월 2일 시위가 격화돼 칠곡 동명에서 시위 주동자로 누명을 쓰고 3년 9개월간 복역. 공군 헌병에 끌려간 것이 마지막 행적. 1950년 8월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처형 추정. 아들 배일천 씨 증언.

신춘생=1902년생 추정. 대구 10월 항쟁에 가담한 남편의 행방을 찾는 형사들이 1946년 10월 4일 대구 중구 자택으로 들이닥쳐 경찰서로 끌고 감. 그로부터 나흘 뒤 풀려난 신 씨는 피투성이 상태. 아들이 업고 집으로 오던 중 사망. 손자 정인희 씨 증언

양영조=1913년생. 청도에서 논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던 중 1950년 7월 보도연맹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붙잡혀 감. 3일 후 경찰서에서 양 씨가 없다고 가족에 통보. 이후 생사를 아직 모름. 남은 육남매 경제적 어려움 겪어. 아들 양태일 씨 증언

이갑식=1920년생. 와세다대 법정대 졸업 후 경북도청과 영양군청에서 근무. 정부와 우익단체로부터 핍박 받은 정황. 1949년 10월 대구 집에서 경찰에 끌려가 대구형무소에 수감. 군사재판에서 이적행위죄로 사형집행됐다는 신문 보도. 아들 이창혁 씨 증언.

이용팔=1925년생.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의 오빠.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추정. 한국전쟁 직후 대구형무소로 끌려간 것으로 추정.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고 진상규명도 이뤄지지 않음. 동생 이용수 씨 증언.

이행영=1930년생.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1949년 12월 등굣길에 경찰들에게 끌려감. 얼마 뒤 김천소년형무소로 이동. 화물차에 실려 대구 가창면으로 보내져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 시신 찾지 못함. 동생 이일영 씨 증언.

장대현=1914~1916년생 추정. 1950년 6월 실종. 청도경찰서에서 호출장이 왔다며 나선 그길로 돌아오지 않아. '곰티재로 엊저녁 다 끌려갔다'는 소식 들어. 다섯 대의 화물차에 사람들을 싣고 갔다고. 남은 세 자매는 고아가 됨. 딸 장영순 씨 증언.

장명환=1928년생. 1949년 군사재판에서 이적행위죄로 사형 집행. 시신수습 못했고 진실화해위 2기 조사 중. 가족 사이에서 쉬쉬하던 중 '가창에서 돌아가셨다'고 전해 들음. 가창골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 조카 장재순 씨 증언.

장재권=1919년생. 칠곡 각산면사무소 직원. 한국전쟁 이후 군인 2명이 포승줄로 묶어 군용화물차에 태워 감.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1950년 7월쯤 가창골에서 처형됐다는 전언. 아내가 1960년 국회 조사 때 신고. 유복자 장도현(72세) 씨 증언.

정정희=1923년생. 10월 항쟁을 주도했던 남편이 여러차례 경찰에 체포. 남편은 한국전쟁 발발 후 피난민과 빈민층, 독립운동가 등을 치료하던 의사. 1950년 8월 7일 경찰이 남편 대신 정 씨를 데려감. 다음날 가창골에서 사망 추정. 아들 이광달 씨 증언.

채병표=1927년생. 1950년 7월 대구 가창에서 총살당한 것으로 추정. 동네 사람들 권유로 어머니가 채 씨의 도장을 넘겨 주면서 보도연맹 가입돼. 조사를 받으며 구타당하다 총살. 시신 수습을 못 하고, 진상규명도 안 됨. 아들 채승기 씨 증언.

최관호=1905년생.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1946년 10월 시위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두목으로 몰려. 해평파출소 앞 농업창고에서 경찰에 의해 즉결처형.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이 석방 지시했지만, 이미 사망한 상태. 손자 최세훈 씨 증언.

최무학·최문학 형제=1946년 10월 대구의대(현 경북대의대) 학생 최무학(1916년생)은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형무소로 끌려가 행방불명. 의사였던 형 최문학(1911년생)은 동생이 10월 항쟁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 다른 가족들도 줄줄이 희생. 최문학 씨 아들 최영진 씨 증언.

추상호=1922년생. 대구 가창면 거주. 친척의 권유로 보도연맹에 가입.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1950년 6월 또래 마을 청년들과 함께 화물차에 타고 떠난 뒤 행방불명. 아직 시신을 찾지 못함. 아들 추종만 씨 증언.

한용수=1921년생. 청도 거주. 친구의 설득에 보도연맹 가입. 1950년 7월 경찰에 끌려감. 청도 승학골로 끌려갔다는 소식. 이후 총살된 채로 발견. 남편을 잃었다는 화병으로 아내는 쓰러져. 딸 한경화 씨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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