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10월 항쟁은 장갑차를 앞세운 미 군정의 가혹한 진압과 계엄령 아래 이틀 만에 끝났다. 하지만 그 저항의 기운은 죽지 않고 메아리처럼 퍼져나갔다. 4번 국도를 타고 영천으로, 5번 국도를 타고서는 칠곡과 구미, 군위로 향했다. 경북 22개 군이 모두 사실상 내전 상황에 돌입했고, 농민 봉기가 전국으로 퍼지는 연결고리가 됐다.
시위는 각 지역의 행정기관 소재지에서 시작해 마치 혈액이 대동맥을 거쳐 모세혈관으로 흘러가듯 군·면·마을 단위로 구석구석 뻗어 나갔다. 도시인 대구와 달리 농민들이 많았던 농촌 지역의 시위는 지주와 일제 출신 관료들의 가혹한 공출·수탈을 불쏘시개 삼아 더 거세게 타올랐다.
◆구전리와 아작골, 1946년 영천의 비극
1946년의 영천은 대구경북 전체를 통틀어서도 10월 시위와 봉기가 가장 격렬하게 전개된 지역 중 하나였다. 매일신문 취재진은 고향 영천의 민간인 학살 조명에 평생을 쏟았고, 1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위원으로 참여한 시인 이중기 씨와 만나 현장을 돌아봤다.
영천은 대구 시위대가 진압된 10월 2일 밤, 현재의 영천보건소 자리에 있던 군청에서 시작됐다. 이중기 씨는 "2일 밤부터 2천~3천 명의 민중이 영천군청 앞 '질청마당'에 모였고, 3일 새벽 조선노동당 경북도당 노동부장이던 정시명이 도착해 적기가(赤旗歌)를 틀며 영천의 봉기가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미군 24군사령부 감찰참모실의 상황일지에도 당시 경북의 숨 가쁜 상황이 고스란히 담겼다. 1946년 10월 3일 오전 7시 45분 일지에는 '영천경찰서 내부가 완전히 파괴됐다'고, 8시에는 '군수가 죽은 것을 발견했다'고 적혔다. 같은 날 영천경찰서와 영천군청 건물에 방화가 일어난 사실도 기록됐다.
영천에서의 격렬함을 설명해주는 두 개의 지명이 바로 '구전리'와 '아작골'이다. 지난 8월 직접 찾아가 본 구전리 마을은 거북이 밭(龜田)이라는 지명에 어울리게 거북 형상의 산세로 둘러싸여 있었다.
산을 몇 개씩 넘어야 도착하는 이 골짜기 마을까지도 76년 전에는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한복판이었다. 영천 황보씨의 집성촌이었던 이 마을에서만 십여 명이 넘는 황보씨들이 10월 사건 이후 멸문지화(滅門之禍)에 가까운 학살을 당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한 조사 참고인은 "10월 사건 후 좌익으로 몰려서 가족이 죽고 집이 불타버려 말로 다 못할 고통을 겪었다. 그 뒤로도 수십 년 동안 마을 사람들은 숨도 못 쉬고 살았다"고 진술했다.
영천 임고면 '아작골'도 그랬다. 다소 섬뜩한 이름을 제외하면 그저 조용한 산촌이었다. 원래 '절골'이었던 이곳의 이름은 10월 사건 이후 한국전쟁까지 200명 여명의 영천 주민들이 끌려와 학살당하면서 '아작이 났다'고 아작골이 됐다.
이중기 씨는 학살 장소를 볼 때마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피학살자 상당수는 시신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보도연맹 사건 때도 10월 항쟁과 관련이 있든 없든 좌익 딱지를 붙여 데려가 죽였다. 억울하게 당한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지주 등을 향한 농민 봉기
좌익 세력이 시작한 영천 시위는 이념의 색채를 벗어난 '농민 봉기'로 전환됐다. 주로 논농사를 지었던 영천 농민들의 경우 60% 이상이 소작농이었다. 지주는 대부분 일제강점기 때 친일 행적으로 부를 쌓은 이들이었다.
농민들은 피땀 흘려 지은 곡식을 지주에게 한 번, 미 군정의 공출에 두 번 빼앗겼다. 일 년 내내 일해 거둔 곡식을 제대로 챙겨 보지도 못했다. 자연스레 항쟁이 일어나자 농민들의 분노는 즉시 악덕 지주와 공출에 앞장서온 경찰, 행정기관으로 향했다.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였던 농민들의 분노에 좌익 세력이 불을 질러준 셈이었다.
이중기 씨는 "소작농들이 가져온 벼를 탈곡할 때 풍구로 바람을 일으킨 뒤 날아 가버린 벼는 소작료에 포함하지 않았다. 심할 때는 절반 이상의 벼가 통과하지 못해서 소작농들의 불만이 많았다"고 했다.
영천은 경북 전체를 통틀어 가장 봉기가 격렬했고, 그만큼 학살 규모도 큰 지역이다. 해방 후 만주·일본 출신 귀환 동포의 유입으로, 식량난이 심했던 점도 봉기에 영향을 미쳤다. 영천은 1944~1946년 사이 인구 증가율이 26%에 달했다. 이 때문에 10월 2~6일 사이 영천의 22개 군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이를 빌미로 이승만 정부는 영천에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전후까지 '토벌 부대'를 집결시켰다. 현지 경찰은 물론 외지에서 들어온 경찰, 국군 백골부대, 서북청년단 출신의 벼락부대, 호림부대까지 영천에 모였다. 이들은 '빨치산 토벌'이라는 명목으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1946~1950년 사이 확인된 영천의 민간인 희생자 수만 200여 명에 이른다.
김일수 경운대 교수는 "항쟁이 유독 폭력적인 형태로 나타났던 영천 등은 분위기를 터뜨릴 수 있는 특수한 힘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며 "지주들이 경영을 악독하게 하면서 민중의 불만이 고조되고, 결국 폭력이 일어나는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도시에서 농촌으로, 전국을 뒤흔든 항쟁
대구 진압에서 도망쳐온 좌익 세력의 유입, 그리고 이에 호응한 농민들의 집단 봉기로 귀결되는 영천 항쟁의 양상은 경북 대부분 지역에서 비슷하게 나타났다.
10월 1일과 2일 대구에서 시작된 시위는 2, 3일 사이 영천과 칠곡, 고령, 군위로 확대됐다. 3일에는 성주, 김천, 선산(구미), 의성, 예천, 영일(포항), 경주로 퍼졌으며, 4일 이후부터는 영주, 영덕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다.
봉기의 유형은 다양했다. 영천과 칠곡, 성주, 의성 등 대구와 가까운 지역을 중심으로는 경찰서를 접수하는 등 가장 강도 높은 충돌이 벌어졌다. 봉화·영주·청도 등에선 다수 면에서 소요가 발생했지만, 경찰서를 접수할 정도는 아니었다. 포항과 김천, 영덕, 상주 등에선 부분적으로 봉기가 일어났다.
이들 지역의 봉기는 대부분 6, 7일 사이 진압됐지만, 농촌 지역 곳곳에선 소규모로 계속 봉기가 일어났다. 12월 말까지 지리적으로 가까운 경남과 강원도는 물론, 멀게는 전남과 경기도, 황해도에서도 농민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자 군경은 전국 곳곳에서 무자비한 유혈진압과 즉결처형을 이어갔고, 결국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뒤에야 시위가 멎었다.
김일수 교수는 "식량을 직접 생산하는 경북의 농민들은 정작 식량이 부족했고, 아사자가 발생하는 등 기아 상태에 빠지기까지 했다. 해방되면 '좋은 나라'가 올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힘든 생활을 겪게 된 것"이라며 "이런 열악한 생활에 10월 항쟁이 터지자 마치 바닥에 뿌린 휘발유에 불길을 던진 것 같은 효과를 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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