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가가 내 봤다 카지마소. 안다고도 카지 말고."
대구 동구의 23㎡(7평) 남짓한 한 임대 아파트에 살던 황보희(1933년생) 씨는 평생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지난 2013년 80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주위 사람들에게 "만났다고도, 안다고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는 성과 이름을 바꿔 '박춘자'라는 가명으로 삶의 대부분을 지내다가 1990년에서야 '황보희'라는 원래 이름을 찾았다.
황보희 씨는 1946년 10월 경북 영천으로 번진 대구 10월 시위에 휘말려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황보씨 집안의 몇 없는 생존자였다. 그의 아버지 황보집 선생은 영천 화북면 구전동(현 화남면 구전리)의 대지주였던 황보가의 종손으로, 집안 사람들과 함께 영천의 10월 시위를 주도했다.
그 결과는 가혹했다. 황보집 선생은 실종됐고, 황보씨 사람들은 '빨갱이 집안'으로 낙인찍혔다. 심지어 동네 전체가 '좌익 마을'로 불렸다. 이후 구전리 사람들 상당수가 차례차례 어디론가 끌려가 사라졌다.
1차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보고서에서 확인되는 황보 집안 희생자만 12명에 이른다. 이중 황보연과 황보준 남매는 10월 사건 관련자란 이유로 각각 17살과 15살이던 1949년 경찰에 사살됐다.
간신히 살아남은 황보희 씨 등 몇몇 가족들은 모두 연좌와 보복을 피해 이름을 바꾸는 등 숨죽여 살았다. 생명만 건졌을 뿐 온 가족이 희생당한 트라우마에 평생을 시달리며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삶을 살다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온 집안이 희생당한 황보가의 사례는 경북의 '10월 항쟁'과 이어진 민간인 학살의 일부에 불과하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울린 총성은 메아리처럼 경북 곳곳으로 퍼져나갔고, 같은 달 2~6일 사이 경북 22개 군 가운데 대부분 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영천과 칠곡, 군위 등 대구와 가까운 지역일수록 주민과 경찰의 충돌은 더 격렬했다. 친일 지주와 미 군정의 가혹한 수탈 속에 먹고 살 방법을 잃어버리고 켜켜이 쌓인 농민들의 분노는 봉기의 기폭제가 됐다.
1949년 발간된 '조선중앙연감'을 바탕으로 정해구 교수가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대구와 경북에서 시위와 봉기에 참여한 연인원은 77만3천 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대구경북 인구 317만8천 명의 24%에 달한다.
대구 10월의 여파는 그해 12월까지 경북을 넘어 전국을 뒤흔들었다. 소작제도에 반대하는 농민들과 결합해 경남(10월), 충남과 충북(10월), 경기도와 항해도(10월), 강원도(10~11월), 전남(10~11월), 전북(12월) 등 전국 73개 시·군으로 번졌다.
김일수 경운대 교수는 "당시 먹을 것이 없어 아사자가 발생할 정도의 식량난이 심각했고, 친일 경찰과 관료를 청산하지 못한 점은 미 군정 아래 한반도가 보편적으로 겪은 문제였다"며 "각 지역의 좌익 조직을 매개로 이런 정세가 겹쳐지며 대구의 10월 시위가 경북을 거쳐 전국으로 확산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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