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라는 말만 들어도
가스실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 냄새가 나는 것 같고
몸부림치며 벽을 긁은 손톱자국이 보이는 듯한데
경대병원으로 병문안 가던 삼덕동 어느 골목이나
여름 원피스 사러 현대백화점 가던 반월당 어디쯤에서
1946년 10월에 쌀을 달라, 친일경찰을 처단하라고 외치던
군중의 무리 속 누군가와 내 발자국이 똑같이 포개졌을지도 모르고
그 발자국의 주인이 멀지도 않은 가창골에서 학살되어
가창댐 아름다운 수변공원 아래 수장되어 있는데
우리는 왜 먼곳의 학살만 기억하는가
<이정연의 시집 '유리구슬은 썩지 않는다' 중에서>
도시마다 역사가 남긴 상처가 있다. 제주에 4월(1948년)과 광주에 5월(1980년)이 있다면, 대구에는 1946년 10월이 있다. 대구의 10월은 한국 근대와 현대의 교차점이자,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미완의 시민혁명'이자 '현대 사회운동의 원형'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당시 대구경북의 시위와 봉기는 며칠 만에 진압됐다. 하지만 이후 남한 단독 정부수립과 국가보안법 제정, 국민보도연맹 조직, 한국전쟁 등 역사 속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됐다.
우리 역사의 비극인 제주 4.3과 여순사건의 원류인 대구 10월, 초기 대구에서 발생한 사건과 그 의미를 짚어봤다. 목격자 증언과 미 군정 문서,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보고서, 연구자들의 저서 등을 토대로 그날의 대구를 재조명했다.

◆대구역 앞 총성과 죽음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선 민심이 들끓고 있었다. 대구부청(중구 동인동) 앞에서 1천여 명이 쌀을 달라며 '기아시위'에 나섰다. 해방 후 귀국한 동포로 인구가 급증했고, 미 군정의 강압적인 쌀 공출과 콜레라로 인한 도시 봉쇄 등으로 대구는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렸다.
대구역 앞에는 파업 중인 노동자 수천 명이 식량과 처우개선 등을 요구하며 시위에 앞장섰다. 노동환경은 일제강점기 때보다 더 열악했다. 전매청 노동자들이 담배를 만들 때 쓰는 풀(쌀이나 밀가루 등의 전분질)을 먹어, 생산에 지장을 빚을 지경이었다.
시위 인파는 점점 불었다. 이날 저녁 대구역 앞에 3천여 명(많게는 6천 명 추산)의 군중이 모였다. 이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심각한 부상을 입는 등 충돌이 격해졌다. 결국, 경찰의 발포로 1명이 숨지고 다른 1명은 중상을 입고 이틀 뒤 사망했다. 저녁 늦게까지 산발적인 총성이 이어졌고 군중은 차츰 해산했다.
당시 대구철도노조 조직부장이던 고(故) 유병화 씨는 당시 상황을 목격하고 첫날 사망한 철도노조원 김용태의 신원을 확인했다. 유 씨는 2013년 국사편찬위원회 구술조사에서 대구역과 공회당(현 대구콘서트하우스) 가운데 도로에서 총상으로 사망한 김 씨를 직접 봤다고 밝혔다.

◆분노한 군중, 도심을 채우다
김용태의 시신은 철도병원 의사 2명에 의해 대구의대(현 경북대 의대)로 옮겨져, 다음날 경찰의 무자비함을 규탄하는 '시신시위'에 등장했다. 시신시위는 성난 민심에 기름을 부었다. 오전 9시쯤 대구의전 학생인 최무학 씨를 주축으로 시신을 들것에 실은 '시체데모단'은 삼덕네거리를 거쳐 오전 10시 전 대구경찰서(현 중부경찰서)에 도달했다.
시위대는 대구경찰서 계단에 시신을 두고 경찰의 발포 중지와 경찰의 무장해제, 애국자 석방 등 구호를 외쳤다. 시위대는 점심때쯤 경찰서를 점거했고, 시위대 대표단은 담판을 짓기 위해 경찰과 대화를 벌였다.
학생들도 동참했다. 경북중과 대구상업학교, 대구여상(제일여상), 능인중, 대륜중, 대구농림, 계성학교 등의 학생들이 거리로 나왔고, 이를 지지하는 시민들도 합류했다. 대구경찰서 앞의 네 방향 도로는 군중으로 가득했다.
대구역 광장에선 파업 시위가 있었다. 좌파정당과 노동조합, 학생자치조직 등이 이를 주도했다. 대구부청 앞 기아시위도 전날처럼 이어졌다. 대구경찰서를 중심으로 대구 도심은 인산인해가 됐다.
당시 대륜중 3학년이던 배일천(91) 씨도 급우들과 함께 교문을 나서 거리로 나왔다. 배 씨는 "우리가 대구역 쪽으로 갈 때 뒤따르는 학생들이 남문시장까지 이어질 정도로 많았다. 우리가 '배고파 못 살겠다' 구호를 외치자 도로변 시민들의 격려가 이어졌다"고 증언했다.


◆곳곳에서 유혈 충돌…계엄령 발령
이날 충돌은 유혈사태로 번졌다. 관련 연구와 구술자료 등을 종합하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2일 오전 정오쯤 대구역 광장 인근에서 경찰의 발포가 있었다.
배 씨는 "점심 때쯤 학생시위대가 공회당 맞은편에 있던 철도노조원과 합세해 대구경찰서 방향으로 돌아 들어가고 있었다. 경찰은 이미 바리케이드 뒤에서 총을 겨누고 있었다. 공포탄을 먼저 쏘더니 곧이어 실탄을 난사했다. 3, 4명이 눈앞에서 쓰러졌다"고 증언했다.
경찰의 발포에 이르게 된 경위는 기록이나 증언마다 엇갈리지만, 거리는 피로 물들었다. 발포에 놀란 군중은 그 자리에서만 흩어졌을 뿐, 오후에는 시위 양상이 더 파괴적인 형태로 확산됐다. 군중은 경찰서와 관공서를 습격하고 친일인사를 비롯해 경찰, 공무원, 부자(富者)들을 주로 공격했다.
미 군정의 '조선 내 대구 소요사태에 대한 보고서'에 따르면 일부 경찰은 무기와 제복을 버리고 도망치기도 했다. 오후 1시 이후 달성공원에선 청년들이 약탈한 식량과 물품을 배급하고, 자발적으로 치안을 유지했다. 미 군정은 당시 상황을 "몇 시간 동안 대구는 폭도의 지배 아래 있었다"고 기록했다.
이날 시위대 20여 명과 경찰, 공무원 다수가 죽었다. 기록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구부 후생과에선 1, 2일 이틀간의 충돌로 민간인 23명, 경찰·관리 11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오후 5시 이후 미 군정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중화기와 차량을 앞세워 진압에 나섰다. 소요사태는 수습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일부 휴업과 파업 등은 계속됐다. 이튿날인 3일에도 의료인들의 진료 거부, 관공서 직원의 파업, 상인들의 휴업이 이어졌다. 8일에야 파업 노동자들이 직장에 복귀해 사태는 표면상 마무리됐다.

◆무자비한 진압과 보복의 시작
3일 이후 거리에서의 폭력은 잦아들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민·관 양측의 극심했던 충돌은 연좌제와 학살이라는 아픔의 시작에 불과했다. 보복은 처절했고 깊은 상처를 남겼다.
정인희(72) 씨의 집안이 그 사례다. 정 씨의 할머니 신충생 씨(당시 44세 추정)는 사건 직후 남편의 행방을 털어놓지 않다 경찰의 잔혹한 폭행으로 사망했다. 중구에서 양곡상을 하던 정 씨의 할아버지 정성록(당시 47세) 씨는 10월 시위에 참가한 뒤 도피 생활을 했다.
정인희 씨는 "10월 4일 점심때 형사 서넛이 집에 들이닥쳐 할머니에게 할아버지의 행방을 묻다 할머니를 대신 끌고 갔다. 가족들은 경찰서 앞을 서성일 뿐,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고 했다.
8일 신 씨를 데리고 가라는 연락을 받고 경찰서에 도착했을 때 자식들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신 씨를 마주했다. 몸이 축 처져서 걷지도 못하던 신 씨는 아들의 등에 업혀 집으로 가던 중 길에서 숨졌다. 당시 신 씨는 임신 상태였다.
채영희 10월항쟁유족회장은 "보통 아내들은 남편의 위치를 절대 털어놓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경찰들이 어린아이에게 피투성이가 된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협박을 해 아빠의 위치를 알아내려는 경우가 꽤 있었다"고 설명했다.
적법절차 없이 진행된 보복의 대상과 양상은 넓고 다양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까지 수많은 사람이 보도연맹 가입과 10월 시위와의 막연한 연관성만으로 죽음을 맞았다. 남은 가족들도 연좌제로 인해 공직에 나서긴커녕 멀쩡한 직업을 갖기도 힘들었다.

◆대구 10월의 의미와 미흡한 진상규명
그동안 '좌익폭동'으로 규정돼 외면받은 대구 10월은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성격을 띤다. 좌익의 지령으로 인한 폭동으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 사건을 심층적으로 연구한 이들의 중론이다.
대구 10월은 10대부터 70대까지 그리고 주부와 학생, 노동자, 공무원, 의사, 심지어 일부 경찰까지 매우 다양한 계층이 쏟아져 나온 민심의 용광로였다.
대구 10월은 크게 두 흐름으로 나뉜다. 2일 오전 시위는 좌익 정치세력 그리고 이들과 긴밀했던 노조, 학생 조직이 주도했다. 이들은 비교적 평화적으로 시위를 이끌었다. 충돌이 격렬해지자 조직을 보호하고자 오히려 시위 가담에 소극적인 움직임까지 보였다. 반면 2일 오후 폭발적으로 번진 소요사태는 해방 직후 사회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한 민중의 분노에 기인했다.
당시 미군 정 자료를 연구한 이동진 경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계엄령 선포 이후 조선공산당이나 학생집단의 조직적 동원은 없었고 2일 이후 미 군정과 협상하거나 폭력 시위를 자제할 것을 호소했다"고 설명했다.
김상숙 성공회대 교수는 "2일 오후 경찰이나 친일 우익인사를 공격하고 재산을 빼앗은 봉기는 민중에 의한 자연 발생적 유형이었다. 지도부가 없었고, 사회적 트라우마가 폭발하자 대구에서 옛 농민들 같은 전통적 민란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고 해석했다.
문제는 진상규명이 속도를 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당시 사건 직후 대구에서 확인된 민간인 희생자만 23명이다. 이름과 나이, 직업을 제외하곤 알려진 바가 아무것도 없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당국은 대구경북에서 7천500명을 검거해 임시수용소까지 설치했다. 1947년 1월 기준 6천580명을 석방했고 280명이 재판을 받았다. 이 중 30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에 대한 연구도 미흡한 상황이다.
김상숙 교수는 "대구 10월은 규모로 봤을 때 해방 직후 대구 지역사회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고, 동학농민운동이나 3.1운동 수준의 전국적 항쟁이었다. 하지만 의미와 실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며 "국가폭력범죄는 정부에서 자료를 은폐하는 경우가 많고, 특히 오래된 일일수록 자료확보가 어렵고 증언에도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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