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싹수가 노래 공무원이 될 수 없다."
여든을 바라보는 최세훈(78) 씨는 20대에 들은 이 말을 생생히 기억한다. 군 제대 후 대학 등록금을 벌고자 일했던 건설 회사의 친한 동료가 한 말이다. 나중에야 그 동료가 정체를 숨긴 채 정부청사 건설 현장에 파견된 중앙정보부 소속 공무원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공무원이 되고 싶다고 하자 세훈 씨의 신원을 몰래 조회했던 것. 따뜻하게 호응해주던 그 동료가 차갑게 돌변한 때도 그즈음이었다.
발단은 세훈 씨의 할아버지였다. 1946년 10월 대구에서 시작된 시위가 구미 지역까지 번졌다. 시위 초기에 할아버지는 군중과 경찰의 충돌을 중재했음에도 오히려 '빨갱이 주동자'로 누명을 쓴 채 경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당시 2살이었던 세훈 씨는 할아버지의 생전 모습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빨갱이'란 이름으로 남은 할아버지의 그림자는 늘 따라다녔다.
지난 8월 구미 해평면에서 만난 세훈 씨는 연좌제로 힘들었던 과거를 회고하며 "그래도 할아버지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구미 독립운동가 최관호, 고문 뒤 즉결처형
세훈 씨의 할아버지는 운파(雲坡) 최관호(1905~1946) 선생이다. 500년가량 구미 선산 해평면 일대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전주 최씨 집안이다. 문중의 종손으로 태어난 그는 경북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었다.
운파 선생은 1929년 만주 하얼빈으로 건너가 사비를 들여 만몽일보를 창간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일제의 만행을 폭로한 글을 써 국내로 송환돼 옥고를 치렀다. 1931년 석방 후 고향으로 돌아와 이육사 등이 주도한 대구경북의 '보도협조망'의 선산 대표를 지냈다.
비극은 해방 이듬해에 찾아왔다. 1946년 10월 16일 군위 소보면의 처남댁에 있던 선생은 산책에 나섰다. 군인 몇 명이 앞을 가로막고서, 아무 이유도 설명하지 않은 채 강제로 해평지서(현 해평파출소)로 끌고 갔다. 그렇게 '빨갱이 두목'으로 몰려 경기도에서 지원을 나온 경찰에 의해 고문을 당했다. 스스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망가졌다.
연행 소식이 전해지자 친척과 지인들은 선생을 구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장택상(1893~1969년) 수도경찰청장에게도 이를 알렸다. 하지만 다음날인 10월 17일 오전 해평지서 앞 농업창고에서 선생은 여러 사람이 보는 가운데 경찰에 의해 재판 없이 즉결처분으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해평지서 경비원으로 상황을 목격한 남모(97) 씨는 "걷지도 못하는 최관호 선생을 농업창고 마당에 던져 놓고, 경찰들이 둥그렇게 둘러싼 뒤 총을 발사했다"며 "그 순간 피가 엄청나게 솟았고, 이를 목격한 뒤 피비린내 때문에 사흘간 밥도 못 먹었다"고 증언했다.
그로부터 1시간 뒤 장택상 청장으로부터 선생을 즉시 석방하라는 급보가 내려왔으나, 이미 모든 일이 끝난 뒤였다.
선생은 10월 봉기 때 혼란을 막고자 동분서주한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이 컸다. 사태 초기인 10월 3일 당시 해평면의 일부 젊은이들이 친일 관리와 경찰을 응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지역에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선생은 흥분한 군중을 설득했고, 이 덕분에 해평면에선 큰 소요사태가 없었다.
세훈 씨는 "당시 친일로 민심을 잃은 지역의 한 유지가 자신과 달리 신망이 두터웠던 할아버지를 밀고했다"며 "누군지 밝힐 수는 없으나 당사자가 숨을 거둘 무렵 이러한 사실을 직접 고백하며 사과를 했다"고 말했다.
◆'빨갱이' 낙인…쫓기듯 포기한 일자리와 꿈
가족에게 남은 건 '빨갱이'라는 낙인뿐이었다. 사건 날 집엔 선생의 아내와 딸, 며느리 등 여자 3명만 있었다. 경찰이 시신을 수습하라고 해 아내(세훈 씨의 할머니)가 갔다. 현장엔 빨갱이라는 이유로 많은 젊은이가 잡혀 있었다. 남편을 잃은 슬픔과 두려움에도 경찰에게 "젊은 사람들이 뭔 죄가 있다고 저래 잡아두느냐, 풀어 줘라"고 일침을 놓은 일화가 지금까지 전해져온다.
그날 오후 내내 집 마루에 선생의 시신을 안치했다. 하지만 찾아오는 이 하나 없었다. 지역 유지 가문의 명망도, '빨갱이'란 낙인 앞에선 한없이 초라한 것이었다. 한밤중에 집안 어른 몇 명이 일꾼을 대동해 찾아와 시신을 지게에 싣고 인근 산에 묻었다. 남들 눈을 피해 급하게 수습하느라 비석도 세우지 못했다.
가족들은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쫓기듯 대구 중구 삼덕동으로 이사했다. 세를 얻어 살면서 이곳저곳 이사를 자주 다녔다. 1950년 한국전쟁 직전 예비검속이 무작위로 이뤄졌던 때, 세훈 씨 이외 가족들이 밤새 경찰에게 연행된 일도 있었다.
당시 경북경찰국(현재 경북경찰청) 사찰담당은 '빨갱이 잡는 호랑이'로 불릴 만큼 악명이 높았다. 취조 중 사찰담당이 같은 전주 최씨 집안 사람이란 걸 알았다. 사찰담당은 "얼른 가라"며 세훈 씨 가족을 돌려보냈다. 세훈 씨는 "같은 집안 사람이라 겨우 살았다. 아니었다면 할아버지에 이어 나머지 가족들도 다 잃을 뻔했다"고 했다.
세훈 씨가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최관호 선생의 아들)는 교사를 그만뒀다. 아버지는 경북고를 거쳐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수재였다. 대륜고 영어 교사로 근무했을 때 형사들이 자주 학교로 찾아와 이것저것 물으며 괴롭혔다. 감시가 너무 심해 일을 계속할 수 없었다. 연좌제 때문에 다른 학교 일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아버지가 일이 없을 때 세훈 씨의 어머니와 고모가 삯바느질로 번 돈으로 온 가족이 버텼다. 늘 가난에 시달려야 했고, 세훈(6남매 중 맏이) 씨 밑으로 동생들이 태어나자 형편은 더 어려워졌다. 세훈 씨는 삯바느질 일감을 서문시장으로 배달하는 일을 도맡았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학업을 이어가던 세훈 씨는, 연좌제로 육군사관학교에 가겠다는 꿈도 접어야 했다. 한 친척 어른은 "네가 육사를 어떻게 가느냐"며 펄쩍 뛰었다고 한다.
◆진상규명…추모와 재평가 움직임
세훈 씨는 냉소적으로 변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1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가 시작됐을 때, 진상규명 신청을 해보라고 주변에서 권유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그랬던 세훈 씨는 10월항쟁유족회에 가입하고, 이번 2기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상규명을 신청했다. 세훈 씨는 "유족회의 권유로 대구 가창골에서 열린 위령제에 간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며 "내가 외면한 사이 다른 유족들은 위령제를 열기까지 많이 노력했다는 걸 깨닫고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지역에서도 추모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난 2017년 구미에서 최관호 선생을 기리는 추모제가 열렸다. 당시 부산대 교수였던 장세용 전 구미시장 등 지역 인사들이 참여했다. 당시 구미시장도 추도사를 보냈다.
구미 지역 추모와 재평가에서, 최관호 선생과 뗄 수 없는 인물이 박상희(1905~1946년) 씨다. 생년이 같은 두 사람은 구미 선산을 대표하는 진보진영 독립운동가였다. 1946년 10월 때 억울하게 죽었다는 점도 같다. 박상희 씨는 그해 10월 6일 경찰에 의해 총살을 당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과정에서부터 친분이 두터웠던 두 사람은 역사의 소용돌이에 목숨을 잃었다. 박상희 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셋째 형이다.
김종길 구미선산지역근현대사 연구모임 대표는 "최관호 선생은 청년 시절에 중국과 러시아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 이후에는 지역 치안 유지를 위해 노력했다. 1946년 10월에는 해평면의 평화적인 집회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 덕분에 구미에선 우익진영의 피해자가 거의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재판 없이 경찰에 의해 즉결처분됐으니 명백히 국가폭력의 억울한 희생자다. 늦었지만 진상을 밝혀야 하고, 더불어 독립운동에 대한 서훈도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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