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변하는 것이야'라고 말하는 시대에 사랑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짓일까? 모든 것이 변해도 사랑만은 변치 않을 것이라고 믿고, 사랑에 목숨을 걸던 시대가 있었다. 그 시대의 사랑은 무언가를 포기하고 고통을 감수해야만 얻어낼 수 있는, 사랑의 무게가 무겁고 심각한 것이었다. 그래서 사랑이란 짐을 지고 먼 길을 함께 가는 것이라 생각했고 사랑에 더 막중한 의미를 부여했다.
이 시대의 사랑은 밝다. 그래서 가볍다. 세대를 막론하고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진다. 적정거리를 유지하며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으니 후유증이 없다. 자기를 내던지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오히려 정신과 상담이 필요한 문제 있는 인간으로 분류된다.
베토벤(1770~1827)의 'Ich Liebe Dich'는 무명 시인 헤로세의 시 '부드러운 사랑'에 곡을 붙인 작품이다. 노래는 이런 가사로 시작된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듯 당신을 사랑해요.'(Ich liebe dich, so wie du mich') 베토벤은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쓴 다음 해인 1803년 이 곡을 작곡했다. 절망적인 상황을 이겨낸 후의 안정된 마음이 짧은 곡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음악가에게 절대적인 청력을 잃게 된 베토벤의 절망은 엄청났다. 또한 '불멸의 연인'으로 알려진 줄리에타 귀차르디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그에게 이 모든 상황을 죽음으로 해결하겠다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게 만들었다. 줄리에타 귀차르디도 베토벤의 무모함에 부담감이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 곡은 사랑을 잃고 난 뒤 죽도록 앓았던 사랑의 의미를 다시 돌이켜보며 쓴 곡이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듯 당신을 사랑해요/ 아침에도 저녁에도
당신과 내가 근심을 함께 나누지 않은 날은 없었지요
내가 근심할 때 당신은 위로해 주고/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울었지요
'Ich Liebe Dich'는 미칠 듯 격렬한 사랑이 아니라 보통 사람의 평범하고 소박한 사랑을 노래한다. 일상의 조촐한 행복이 담긴 이 곡에는 종교적인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어쩌면 사랑이야말로 어떤 종교보다 더 위대한 종교인지 모른다. 'Ich Liebe Dich'를 조용히 흥얼거리다 보면 겸손한 신앙의 토대 위에 이루어진 루터 교도의 성실한 가정이 떠오른다. 소박한 시에 얹힌 단순한 선율에는 부엌에서 끓고 있는 수프와 빵 굽는 고소한 냄새가 묻어나오는 것 같다. 정감 넘치는 식탁에 마주 앉아 드리는 사랑의 기도에는 깊은 신뢰와 감사가 담겨 있다.
독일에서 오랫동안 독일 음악을 연구한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수천 곡의 독일 가곡 중에서 단 한 곡을 든다면 어느 곡이 될까요? 물음이 떨어지기도 전에 답이 돌아왔다. "그야 베토벤의 'Ich Liebe Dich'지요." 그 답에 지금도 수백 번 공감한다. 위대한 진리가 단순하듯 위대한 음악도 단순하다. 자신의 체험과 신념을 통해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노래하는 베토벤의 곡은 조촐하지만 깊고 견고하다.
서영처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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