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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170>흑백의 수묵으로 화려한 심사정의 수묵 화조화

미술사 연구자

심사정(1707-1769),
심사정(1707-1769), '화조도', 1767년(61세), 종이에 먹, 136.4×58.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심사정의 '화조도'는 채색화를 당연하게 여기는 이 장르의 관례와 동떨어진 수묵화이고, 잘 가꾸어진 정원이 아니라 들판 언덕이 이 그림의 배경으로 떠올려지는 점도 이색적이다. 쌍쌍이 나는 대신 홀로 앉아있는 새는 화려해야 할 화조화에 쓸쓸함을 더한다. 담채와 진채를 다 잘 다뤘고, 아름다운 채색 화조화도 즐겨 그린 심사정은 50대 이후 수묵으로 화조화를 많이 그렸다. 왜 먹만으로 화조화를 그렸을까?

수묵 화조화는 서울의 양반 중에서도 일류였던 가문이 할아버지 대에 역모사건으로 몰락해 역적의 손자라는 멍에를 지고 직업적인 화가처럼 그림을 그렸던 심사정이 개척한 색다른 분야다. 양반 출신이어서 필기구로 익숙한 지필묵을 더욱 잘 다룰 수 있었고, 오랫동안 감상화의 세계에서 우월적 지위를 누려온 수묵이라는 재료는 양반인 화가라는 그의 처지에 잘 맞는 특화된 분야였을 것이다.

화면 왼쪽에 목련을 높이 뻗어 올리며 내려다보는 새 한 마리를 가지에 앉혔고, 그 아래 꽃봉오리 하나와 만개한 모란 두 송이를 그렸으며, 바닥은 바위로 중심을 잡고 야생 난초와 민들레 등으로 안정감을 줬다. 화면의 중심은 모란과 바위다. 꽃이 크고 꽃잎이 풍성한 모란은 부귀를, 석수만년(石壽萬年)의 바위는 장수를 상징한다.

모란꽃과 잎사귀의 발묵 표현이 압권이다. 먹의 우아한 농담만으로 꽃잎의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질 듯하고 짙은 먹으로 점처럼 그어 놓은 꽃술은 입체감을 준다. 잎사귀 형태와 매끄러운 질감 또한 몇 가닥 잎맥으로 더욱 생생하다.

먹과 물과 붓이 종이 위에서 대가의 손과 만났을 때만 가능한 수묵의 오묘함이다. 한국회화사에서 수묵화를 잘 그린 화가는 많지만 심사정은 먹을 채색처럼 사용한 드문 화가다. 수묵을 수묵으로 쓰는 것과 수묵을 채색처럼 활용하는 것은 다르다. 발묵 효과와 농담 대비만으로 모란꽃의 풍려함을 손색없이 그려낸 심사정의 묵모란은 수묵의 화려함이라는 아이러니한 감흥을 준다.

수묵 모란도는 심사정 이후 간혹 그려졌지만 추사 김정희의 제자 소치 허련에 의해 19세기에 많이 그려져 허련의 묵모란은 '허모란'으로 불리며 인기를 끌었다. 묵모란도는 먹이라는 재료가 표상하는 감상화의 품위에 부귀의 상징인 모란을 결합시킨 그림이다. 고상한 아취와 부귀영화 둘 다를 바라는 것이 누구나의 소망이다. 20세기에는 김은호의 백모란, 박생광의 흑모란이 동양화 수집가들의 목록에 들어있었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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