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지난 3일 한국을 "국제사회의 다양한 과제에 대응하기 위해 협력해야 할 중요한 이웃 나라"라고 규정하는 연설을 했다. 한국 법원의 일제 강제 동원 노동자와 위안부 배상 판결에 대해 한국 정부가 이를 바로잡는 조치를 계속 요구한다는 그간의 강경한 연설과는 결이 많이 다르다.
4일에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따른 한국산 전기차 차별 해소를 위해 협의하자는 친서를 윤석열 대통령에게 보내왔다. 당장 해법을 찾은 것은 아니지만, 바이든 대통령이 IRA와 관련된 한국의 우려를 언급하며 해결 방안을 찾자는 제안을 한 사실은 긍정적 신호다.
6일에는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가 통화를 갖고 북한 문제 해결을 위한 공조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일련의 상황 전개는 '외교 참사' 프레임이 사실과 다른 것이었음을 말해 준다. 야당이 '굴욕 외교'라고 비난했던 기시다 총리와의 회동이 있었기에 "한일 문제에 대해서는 유엔총회에서 윤 대통령과 의사소통을 했는데 미래 지향적 발전을 모색하고 싶다"는 기시다 총리의 언급이 나올 수 있었다. 한미 정상 간 '48초' 만남도 그렇다. 두 정상이 런던과 뉴욕에서 여러 차례 논의를 진행한 것이 바이든 친서로 이어질 수 있었다.
나는 지난번 칼럼에서 야당과 일각의 비난이 '외교 참사'가 아닌 '정치적 참사'라 지적한 바 있다. 누구를 두둔하거나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외교는 끈질긴 대화를 통해 상호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선행된 후에야 조그만 열매라도 수확할 수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식상하지만 외교 안보에는 여야가 없다는 정치인들의 말이 단순히 입에 발린 수사여서는 곤란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기도 했다. 대통령이 아직 해외 순방 중에 있는 상황에서 가짜 뉴스까지 퍼뜨리며 흔들어 댄 결과로 우리에게 돌아온 이익이 과연 무엇인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문제는 그런 헛된 소동에서 아무 교훈도 얻지 못한 것 같다는 사실이다. 외교를 망치기 위해 허위 사실, 가짜 뉴스를 유포했던 사람들은 아직 사과 한마디 없다. 검은 모자와 베일은 미망인이나 왕족들만 쓰는 것이라는 허위 사실을 전하며 공중파 방송에서 이죽거렸던 이른바 방송인, 조문록을 왼쪽에 쓰는 것은 의전의 기본을 모르는 행동이라고 비판했던 전직 의전비서관 등도 모르쇠로 일관한다. '(미국) 국회'라는 자막으로 사실을 왜곡한 방송사도 마찬가지. '비속어 논란'이라며 대통령의 사과를 끈질기게 요구하던 사람들도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7일 북한 미사일 도발에 대응해 열리는 한·미·일 군사훈련에 대해 "왜 하필 독도 인근에서 하느냐"며 "극단적 친일 행위"라고 비난했다. 당장 이번 훈련은 문재인 정권 때인 2017년 10월 3국 국방부 장관의 합의에 따른 것이며 2017년 4월에도 제주 인근 해역에서 한·미·일 훈련이 열렸다는 반론이 나온다. 2007년 9월 노무현 정부에서 해상자위대 함정이 욱일기를 게양한 채 인천항에 입항한 사실도 있다. 훈련 장소는 독도에서 185㎞, 일본 본토에서 120㎞로 오히려 일본 근해에 가까운 해역이었다. 북한 잠수함에 대비한 훈련이었기 때문에 동해상에서 하는 것은 당연하다. 군사훈련을 함께 하는 것과 일본 자위대를 군대로 인정하는 것은 차원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자위대를 군대로 인정하느냐 따진 것은 견강부회일 뿐이다.
애증이 얽힌 한일 관계는 우리가 익히 경험한 대로 일도양단식 해법이 어려운 게 사실이다. 문제는 친일 프레임을 만들어 국내 정치에 이용하는 자해적 행태가 여전하다는 사실이다. 이 대표가 한일 안보협력과는 별개로 일본과의 군사훈련은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을 했다면 충분히 경청할 수 있었을 것이다. '친일' 비난부터 하고 들어간 것은 역풍을 자초하는 일이다. 외교에 이어 안보 문제까지 정쟁의 대상으로 만든다는 지적도 피할 수 없다. "이웃은 지리적 숙명이지만, 동맹은 필요에 의해 만드는 것이다."(케네디) "갈등이 있더라도 동맹과 함께 싸우는 것이 동맹 없이 홀로 싸우는 것보다 낫다."(처칠) 이 대표가 지자체 차원을 넘어 국가 정치지도자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새겨야 할 경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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