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고마움<감동≦사랑

이화정 소설가

이화정 소설가
이화정 소설가

친구가 꽃다발과 함께 봉투를 내밀었다. 언제부터인가 친구는 내 생일에 물건 대신 돈을 선물했다. 그 의도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친구에게 돈을 받는 것은 어색한 일이었다. 그러지 말라고 몇 번 얘기했는데, 그저 예의상 하는 말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날, 생일을 축하한다며 엄마도 봉투를 쥐여주었다. 오늘처럼 명분이 분명한 날은 물론이고, 어설픈 구실로 나를 호출한 뒤 엄마는 자주 내게 돈을 건넸다. 사양하면 이제 엄마 노릇도 못 하게 하느냐고 침울해 하셔서 받는 수밖에 없다.

친구의 돈을 받을 때와 엄마의 것을 받을 때, 내 기분은 미세하게 달랐다. 자존심이나 혈연 같은 문제가 아니었다. 빳빳한 오만원권 지폐 여러 장이 든 친구의 봉투는 뭔가 모르게 좀 아쉬운데 반해, 해진 만원짜리의 허리가 노란 고무줄로 친친 감긴 엄마의 돈은 명치 아래가 저미듯 아렸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자전 소설로 잘 알려진 '연인'은, 가난한 열다섯 살 프랑스 소녀와 삼십 대 후반의 부유한 중국인과의 사랑 이야기다. 기자가 무엇이 어린 당신을 중국인 연인 곁에 머물게 했는지 물었을 때 그녀는 '돈'이었다고 대답했다.

'응접실과 다름없이 안락했던 자동차와, 그 자동차의 운전수를 내 마음대로 쓰는 것. 그가 입은 실크 옷에서, 그의 살갗에서 풍기는 성적인 냄새, 그 정도면 사랑이 시작될 수 있다'고. 나는'실용적인 혹은 편의상의 이유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이미 사랑'이라고 말하는 뒤라스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다. 굳이 구분하자면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고마움'이 아닐까. '고마움'은 내게 없는 것, 내게 부족한 것,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누군가가 정확하게 공급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그것이 사랑이 되려면, 편의상 제공되던 그 모든 것이 사라져도 그를 향한 마음이 그대로여야 한다.

나는 친구의 돈에서 고마움을 느끼고, 엄마의 돈에서 사랑을 느낀다. 친구의 돈에는 없는 것이 엄마에겐 있기 때문이다. 바로 '감동'이다. 엄마의 돈에는 나를 위하는 마음과 더불어 나만이 아는 노동과 절약이 숨어있다. 친구의 돈에는 그'수고'가 빠졌다.

'고마움'과 '감동'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고마움'은 상대의 마음이 내게 와 닿는 것이고, '감동'은 그것이 닿아 내 마음마저 요동치게 만드는 것이다. '고마움'은 나의 결핍이 너로 인해 충족되었을 때 생겨나고, '감동'은 너의 충족을 내게 양보했을 때 일어난다. 그래서 '고마움'은 전혀 알지 못하는 관계에서도 일어날 수 있지만, '감동'은 대체로 사랑하는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다시 만난 친구의 손에는 작은 선물이 있었다. 저렴하고 유용한 선물을 바라며 정색하고 돈을 거절한 내게 잔뜩 볼멘소리를 해댔다. 이거 고르느라 일주일은 고민했다고 핸드크림을 내밀었다. 뚜껑을 열고 손바닥을 탁, 탁, 쳐서 로션을 발랐다. 쌉싸름한 자몽 향기가 순식간에 공기 중으로 퍼졌다. 좋냐? 친구가 물었다. 응, 감동적이야! 내가 말했다. 우리는 마주 보며 웃었다.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