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파 못 살겠다, 쌀을 달라!"
1945년 해방 이후, 민중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기아와 빈곤에 내몰린 탓이다. 배고픈 노동자들은 쌀 배급과 감원 반대,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섰다. 전염병으로 봉쇄조치가 내려진 대구의 식량 사정은 더 심각했다. 경북 농촌에선 가혹한 쌀 공출로 농민들의 불만이 컸다. 1946년 10월 대구경북의 시위와 봉기는 심각했던 사회경제적 혼란에서 비롯됐다. 벼랑 끝에 선 민중의 분노가 '대구 10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미 군정의 식량정책 실패
일제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맞이한 변화는 안타깝게도 식량난이었다. '해방의 선물은 기근'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광복'의 기대는 곧 실망과 좌절로 바뀌었다.
미 군정은 한국 주둔 직후 일제의 쌀 공출 제도와 식량 배급제를 폐지하고, 자유시장제를 도입했다. 하지만 시장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았고, 매점매석(買占賣惜) 등으로 쌀값이 치솟았다. 쌀을 일본으로 밀수출하는 지주나 중간 도매상도 있었다. 이에 미 군정은 1946년 1월 최고가격제를 시행해 한 말에 75원까지만 받도록 했지만, 대구지역 시장에서의 쌀값은 400원을 넘었다.
결국, 미 군정은 경찰까지 동원한 미곡수집령을 내려 강제공출에 나섰다. 특히 경북에서의 공출이 혹독했다. 조선은행 조사부의 1946년 경제연감에 따르면 미 군정은 경북의 쌀 생산량 90만 석 중 21만 석(23.6%)을 강제 수집했다. 이는 전국 수집량(61만 석)의 34%에 달했다. 특히 생산량이 가장 많았던 전남에서 154만 석 중 4만 석(2.1%)만 수집한 것과 비교하면, 경북에서의 공출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대륜중 3학년 재학생으로, 1946년 10월 시위에 동참한 배일천(91) 씨는 미 군정의 공출이 일제보다 혹독했다고 증언했다. 배 씨는 "일제에는 곡식을 적당히 숨겨 놓으면 넘어갈 수 있었던 반면 미 군정의 공출은 집안 사정을 훤히 알만한 사람들을 보내 쌀 한 톨 남김없이 빼앗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농민들은 가재도구를 팔거나, 시장에서 곡식을 사서 할당량을 채워야 할 정도였다. 가혹한 공출 과정에서 청송과 봉화, 영덕 등 경북 산간지역에선 아사자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귀국 동포로 인구 폭증…고물가·고실업·전염병
해방 이후 귀국한 동포들로 불어난 인구는 식량난을 더욱 악화시켰다. 대구는 당시 개성에서 출발한 이재민 열차의 종착점이었다. 중국과 러시아에서 귀국한 사람들이 대구에 정착하기도 했다.
대구 인구는 1944년 20만7천 명에서 1946년 8월에 26만8천 명으로 늘었다. 대구시사에 따르면 1947년 5월 기준 귀향 이재민은 8만2천241명으로 집계될 정도로 많은 수를 차지했다.
늘어난 인구 탓에 실업 문제가 심각해졌다. 경상북도사에 따르면 해방 직후 경북 공업 분야에선 기술자 부족, 원료 및 전력 확보 문제 등이 겹쳐 가동률이 35% 수준에 그쳤다. 이로 인해 1946년 11월 기준 경북의 실업자는 경남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고, 전국 실업자의 32%를 차지했다.
토지나 주택 역시 턱없이 부족했다. 배일천 씨는 "등·하굣길에 수성교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면 온통 빈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른들은 고물을 줍거나 구걸하러 다니고, 여자아이들은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면서 어렵게 살았다.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홑이불로 덮어씌워 놓은 모습이 흔했다"고 증언했다.
늘어난 통화량은 사람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었다. 일제는 통치 말기 질 나쁜 화폐를 대량 유통해 인플레이션을 유발했는데, 미 군정이 기존 화폐를 인정함으로써 문제를 키웠다. 특히 조선총독부는 퇴각자금을 마련하고자 대규모 화폐를 발행했다. 빈번했던 위조지폐 사건도 물가상승을 부채질했다.
이 가운데 1946년 콜레라가 창궐했다. 대구경북에서 5천348명이 콜레라에 걸려 4천332명이 숨졌다. 미 군정은 콜레라 확산을 막고자 대구 출입을 통제했다. 봉쇄로 의약품과 생필품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했다. 민생고가 극에 달했다. 무엇보다 쌀이 부족했다. 이런 상황은 10월 항쟁의 한 축을 이룬 '기아 시위'로 이어졌다.
당시 신문 보도에는 "콜레라에 아무 대책도 없이 교통을 막으면 굶어 죽으란 말이냐"는 시민들의 항의가 적나라하게 담겼다. 매일신문의 전신 남선경제신문은 1946년 7월 2일 자에는 "식량을 달라는 외침 소리는 홍수와 괴질에 사무친 대구의 거리에 비장하게 울리고 있다"고 썼다.
◆노동·학생운동…친일 경찰의 득세
이 시기 대구에선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이 활발했다.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릴 정도로 진보적 색채가 강한 도시였다.
노동운동의 배경에는 해방 이후 나빠진 노동자들의 근무여건이 있었다. 대구철도노조 조직부장이던 고(故) 유병화 씨는 국사편찬위원회 구술조사에서 "일제에는 야근하면 식사가 나와서 모두 밤참을 먹고 충분하게 쉬었는데, 해방 이후에는 24시간 맞교대 근무를 하는 등 나빠진 근무환경에 불만이 쌓였다"고 했다.
대구에선 대구전매국과 남선합동전기주식회사(남전) 대구지점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이 활발했다. 철도와 섬유 부문을 중심으로 1946년 '9월 총파업'에도 참여했다. 학생운동은 1945년 일제식 교수 태도를 버릴 것을 주장하는 동맹휴학을 시작으로 꾸준히 이어졌다.
이러한 노동·학생운동을 친일 경찰이 강압적으로 진압하면서, 대구 10월 시위가 폭력적으로 번지는 계기가 됐다.
실제 미 육군 브라운 소장과 김규식, 여운형 등이 참여한 공동회담 회의록(1946년 11월 26일)을 보면, 당시 사태의 원인으로 인사 문제를 첫손가락에 꼽았다. 회의록은 당시 경찰 고위직 중 상당수가 일제에 복무했던 이들이고, 1946년 11월 8일 기준, 2만5천 명의 경찰 중 약 5천 명이 일제에 복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 군정은 대구 10월 후속대책으로 "일제에서 고위직으로 복무했거나 경찰 내 민주주의 원칙에 벗어나는 이들을 조직에서 제거해야 한다"며 "모든 조선인 관리들의 기록을 통해 과거 친일파를 찾아내고, 명백하고 악명 높은 친일파들은 제명하고 애국인사들로 대체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대구 10월'의 역사적 재조명
연구자들은 이 같은 시대적 혼란상 등을 폭넓게 평가해야 대구 10월 항쟁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구 10월을 '폭동'이나 '사건'이 아닌 '항쟁'으로서 의미를 부여하고, 2·28민주화운동, 국채보상운동 등과 같이 지역사회에서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동진 경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대구 10월 항쟁은 추진이 어려웠던 '농지개혁'을 이승만 정부로부터 끌어낸 원동력이 됐을 정도로 파급력이 컸다. 이를 제대로 규명하지 않고선 역사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을 정도"라며 "국채보상운동과 3·1운동, 2·28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흐름 가운데 대구 10월이 있다. 시민들이 이를 알 수 있게 기념사업이나 추모 공간 등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창원 계명대 교수는 "역사적 평가가 한 가지일 순 없다. 공권력과의 충돌에 대해 정치적인 시각을 배제하고 당시 시민들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도가 필요하다. 10월 항쟁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긍정적 요소를 찾는 과정은 우리 지역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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