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활동으로서의 미술비평

최성규 미술중심공간 보물섬 대표

최성규 미술중심공간 보물섬 대표
최성규 미술중심공간 보물섬 대표

대구경북 미술계엔 비평이 없다. 맞는 말일까. 실제로 미술비평은 꾸준히 생산되고 있다. 전시장 어디를 가든지 전시와 작품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려주는 글이 전시장 입구에서 찾아볼 수 있고 소책자나 '핸드 아웃'이라 불리는 A4 종이 한 장에도 전시된 작품의 의미를 친절하게 설명하는 글이 실려있다. 그런데 왜 대구경북 미술계엔 비평이 없다고 하는 걸까.

미술비평의 종류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도 현재의 미술에 불만을 가지고 미래의 미술을 위해서 논쟁점을 만들어 여러 사람이 그 논란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미술비평의 중요한 역할로 생각한다면 대구경북 미술계에서 그런 종류의 비평은 찾아보기 드물다. 아마도 대구경북 미술계에 비평이 없다는 말은 위의 의미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것으로만 '실제로 있는' 미술비평이 없다고 느끼는 기이한 현상을 충분히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대구경북에서 매년 열리는 전시는 많다. 하지만 전시가 열리고 막을 내리면 기억에 남는 전시가 얼마쯤 되는지 생각해볼 문제다. 더군다나 기억에 남는 전시가 좋은 전시라는 확신도 없다. 미술비평의 역할 중 하나가 남겨야 할 가치 있는 전시를 기록하는 일이라면 고민은 더욱 깊어진다. 하루를 정리한 메모장에서도 남겨야 할 내용은 시간이 지나며 지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사회적 합의를 거쳐서 도출된 '역사적으로 쓸만한 전시와 작품'은 안정된 주제다. 그에 비해서 현재 열리는 전시는 무엇을 남겨야 할지 불명확하다. 더군다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앞으로의 미술에 손을 대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미술비평은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도 쓰는 이와 읽는 이를 동시에 괴롭힌다. 미술비평의 목적이 상대방에게 뭔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면 명확하고 쉽게 전달될 수 있도록 쓰여야 한다. 하지만 모든 미술비평이 쉬울 수는 없다. 언어로 나타내기에 모호하고 애매한 시각예술의 성격과 모호한 미학적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는 모호하고 애매하게 쓸 수밖에 없을 때도 있다. 쉽게 쓰는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이론과 권위에 기대서 잣대를 세우는 글은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동시대 미술이라는 용어를 앞세워 현재의 미술작품을 평가하는 일은 쉬운 일이다. 외국의 유명한 비엔날레와 도큐멘터의 예를 들며 빈약한 우리의 미술을 한탄하는 일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동시대 미술계에서 '회화는 죽었다'는 말은 현실에 존재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살펴보며 조심스럽게 해야 할 주장이다. 하지만 이런 독선적인 의견과 주장이 미술비평이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존재한다.

활동으로서의 비평이 필요하다. 역동적인 현재를 담아낼 수 있는 글쓰기가 필요하다. 유행에 따른 미술비평이나 '동시대 미술'과 같은 어떤 잣대에 의한 미술비평은 활동으로서의 비평을 억압한다. 활동으로서의 비평은 변명의 도구나, 있으면 폼나는 전시의 장식이 아니라 누구나 전시와 작품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미술계에 어떤 주제와 문제의식이든 제안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글 활동이다. 활동으로서의 비평은 우리의 상황과 조건을 고려하며 어떤 활동이 필요한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SNS, 웹, 잡지, 토론회 등 다양한 글쓰기의 통로를 통해서 생산될 수 있다. 비평이 없다고 느끼는 미술 현장은 작가와 비평가를 서로 존중하지 못하게 만든다. 미술 활동의 한 부분으로서의 미술비평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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