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외투를 뒤집어쓰고 민정 암행의 길을 나섰다. 담당 부서가 청등홍등이 난무하는 뒷골목 아씨들의 생활 조사라 빛 좋은 개살구 격의 업태부 해방령이 있은지 2개월 뒤 그들은 과연 어떤 움직임을 하고 있는가를 살피느니만큼 미상불 흥미조차 느끼며 첫 코스를 달성동으로 옮겼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9년 1월 12일 자)
갑작스레 추웠던 날씨가 약간 풀리기는 했으나 그래도 밤거리는 오싹했다. 기자는 외투를 뒤집어쓰고 민정 암행의 길을 나섰다. 시민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형편을 알아볼 요량으로 기자라는 신분을 숨기고 취재에 나섰다. 말하자면 탐사취재였다. 기자가 찾은 현장은 청등홍등의 불빛이 새어 나오는 달성동 뒷골목 유흥가였다. 업태부 해방령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시점에 유흥가인 달성동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일제 강점기의 유흥은 요정이 대표적이었다. 요정에서는 권번의 기생들이 손님을 맞았다. 대구에는 달성권번, 대동권번 같은 유명한 기생조합이 있었다. 해방 직후에는 화월, 수향원 같은 요정에 손님이 줄을 섰다. 일제시대의 유흥 패턴이 그대로 유지됐던 셈이다. 게다가 미군정의 실시로 카바레와 댄스홀, 바 같은 서구식 유흥문화가 유입됐다. 한쪽에서는 기아에 허덕이고, 또 한쪽에서는 향락이 활개치는 일이 벌어졌다.
유흥업의 성행은 시민들에게 이질감을 확대했다. 시민들의 눈길이 곱지 않자 당국은 업소를 줄이려 했다. 권번 기생은 가무, 기예 등의 시험을 통해 자격심사를 강화했다. 기생의 진입장벽을 높이려는 의도였다. 카바레, 카페 등도 미군 전용 업소만 허용키로 방침을 정했다. 고급요정은 장부를 조사해 부정 이득을 처벌하려 했다. 지금의 세무조사에 해당했다. 위생점검으로 업소 압박에도 나섰다. 그리고는 1948년에 이르러 공창제도를 폐지했다. 공창은 일제의 유곽으로 등장해 성매매로 이어졌던 곳이었다. 뒤이어 업태부 해방령도 실시했다.
업태부 해방은 뭘까. 업태부 해방은 작부를 줄이려는 고육지책이었다. 손님을 접대하고 술 시중을 드는 여자의 증가를 막아야 했다. 고급요정이 첫 타킷이었다. 요정을 문 닫도록 해 업태부에 해당하는 기생, 댄서, 작부, 여급 등의 요정 고용을 차단하려 했다. 요리점, 음식점, 오락장에서도 업태부 영업을 할 수 없게 했다. 또 업태부들을 술집이나 개인에게 소개하지 못하도록 했다. 업태부를 양성하거나 알선하기 위한 권번 등의 기관은 해산을 결정했다.
업태부 해산은 유흥업소를 줄이고 여성을 보호한다는 점에서 인정할만했다. 하지만 준비 없는 시행으로 적지 않은 부작용을 낳았다. 업태부들은 일자리를 구할 틈도 없이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요정 대신에 다른 유흥업소로 몰렸다. 시행 초기부터 입술은 빨갛고 향내를 피우는 기생, 작부들이 공장이나 식모로 가겠느냐는 말이 나돌았다. 우려는 사실이었다. 달성동의 카페서 일하는 여급도 요정 출신이 적잖았다. 고급요정에 일했던 여급일수록 수입이 줄어 궁핍한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이러다 보니 유흥업에 다시 발을 디딘 여성 중에는 지난 시절의 기생생활이 나았다는 푸념도 나왔다. 그 당시는 규정된 화대와 의복감, 화장품까지 받아왔다는 회고였다. 고급요정을 떠난 뒤 현재의 업소에서는 월급으로 채 1만 원도 받지 못한다는 호소였다. 한 여급은 다섯 식구가 함께 살다가 수입이 줄자 노부모를 고향으로 보냈다. 여섯 식구를 부양하던 또 다른 여급은 치마저고리와 장신구를 전당포에 맡겨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었다. 겨울을 지낼 식량과 김장, 장작바리를 준비한 여급은 열사람 중 셋에 불과하다며 신세 한탄을 해댔다.
급하게 이뤄진 업태부 해방은 여급 종사자의 건강도 악화시켰다. 기생, 작부들의 화류병이 밀물처럼 번졌다. 이즈음 실시한 대구부내 검진자 400명 중 90%나 탈이 난 상태였다. 이처럼 업태부 해산은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빛 좋은 개살구가 되고 말았다. 요정의 기생은 이름이 바뀐 접대부로 손쉽게 이동했다. 접대부는 손님에게 술을 따를 수 있었다. 기생의 역할과 비슷했음에도 수입은 줄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권번 소속 접대부 수백 명이 기생으로 다시 돌아가게 해 달라는 진정을 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업태부 해방으로 달라진 점은 뭐였을까. 고작 기생 여급을 접대부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또 여자 종업원이 약간 줄었고, 영업시간은 밤 11시에서 10시로 단축되었다. 기생의 가무 대신에 레코드판이 돌고 손님과 섞여 춤판이 벌어졌다. 한해 뒤 보건부는 요정과 기생제도의 부활이 필요하다고 입장을 바꾸기도 했다. 간판과 이름을 바꾸고 영업을 하는 업소의 단속이 어렵다고 이유를 들었다. 속내는 세수 증가에 도움이 되는 유흥업을 그냥 둘 수 없었다.
업태부 해방의 당위성이야 말해 무엇하랴. 하지만 준비 없이 실시된 업태부 해방령에 청등홍등 달성동 뒷골목은 민낯 그대로 드러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박창원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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