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 우리들의 일그러진 우상과 마주하기

김희경 경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교수

김희경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
김희경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

지난 9월 28일 다큐멘터리 영화 '성덕'이 극장에서 개봉됐다. 202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영화 '성덕'은 '메이드인 부산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고, 런던아시아영화제, 제58회 대종상영화제 다큐멘터리상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특성상 상영관 수가 적고 상영 회차가 많지 않음에도 1만 관객을 돌파하기도 했다. '성덕'은 '성공한 덕후'의 줄인 말이다. '덕후'는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우상화하며 그와 관련된 정보를 탐닉하는 사람들로, '팬'이라 불리기도 한다.

영화 '성덕'의 오세연 감독은 중학생 시절부터 가수 정준영의 팬으로, 그의 눈에 띄기 위해 사인회 현장에 한복을 입고 갈 만큼 신실한 팬이었다. 그랬던 감독은 2019년 '버닝썬 사태'를 맞이한다. 버닝썬 수사 과정에서 정준영은 성관계 불법 촬영 및 음란물을 유포한 죄로 구속됐다. 자신이 좋아하던 대상이 성범죄자가 되면서 감독 역시 '실패한 덕후'로 전락했다. 그런데 이 사건을 계기로 오 감독은 자신과 비슷한 상처를 입은 자신의 오랜 친구들, 어머니를 돌아보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들에게까지 그 시선을 확장해 나가며, 팬덤이라는 현상의 사회적 뿌리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문화인류학자 이응철은 그의 논문('우리는 항상 무엇인가의 팬이다: 팬덤의 확산, 덕질의 일상화, 취향의 은폐')에서 팬질을 '일종의 생애과정 의례'로 바라보아야 하며, 스타는 좋아하는 대상이기도 하지만 일상적 상호작용의 매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생애 과정 속에서 팬질은 친구들과의 친분 유지를 위한 수단이자 일상에서 접하기 어려운 정보를 접할 기회이자 다양한 연령대와 사회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상호작용을 하는 방식을 배우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또한, 스타를 매개로 체득한 문화 코드를 활용해 그들만의 새로운 문화 형식을 창조하기도 한다. 우상이 몰락했음에도 여전히 우상에 대한 사랑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지지자로 살아왔던 자신들의 시간과 역사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상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일부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영화는 "사랑에 빠지는 게 죄는 아니잖아"라는 식으로 덕질을 무조건 예찬하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우상의 몰락에 팬들이 힘들어하는 이유가 복합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상을 무조건 지지하고 옹호했던 나의 사랑이 간접적으로 그의 범죄에 면죄부를 주거나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로 귀결됐던 것은 아닌가'하는 죄책감이 팬들을 힘겹게 만든다. 이러한 팬들의 모습을 통해 감독은 우상에 대한 사랑이 지나친 나머지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정보만 받아들이는 '확증 편향' 상태에 빠져있었던 것은 아닌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함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비합리적이고도 허망한 덕질을 멈춰야 할까. 자신의 우상에게 호된 배신을 당하고도 오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덕질 장려 영화'라고 말한다. 합리적이지 않아 보임에도 우리가 덕질에 끌리는 이유는-네덜란드의 사상가 요한 하위징아의 통찰에 의거해 살펴본다면-덕질의 비합리적인 특성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합리적 존재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덕질에는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인간의 갈망이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우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가 자동적으로 나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때로는 우상에 대한 지나친 사랑이 진실을 외면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한 통렬한 성찰 역시 필요로 한다. 타자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발판삼아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것은 본래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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