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자는 아닌데 어찌하다 보니 기독교 단체에 후원을 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많은 후원 아동 중에서도 선진이는 아픈 손가락 같은 아이였다.
선진이 부모님은 부도가 나면서 채권자들에게 시달리다 못해 야반도주를 했고 결국 일흔 가까운 선진이의 할머니가 아이들을 맡았다고 들었다. 내가 선진이를 후원하기 시작한 건 10살 때였다. 사진 속의 선진이는 발그레한 볼에 예쁜 웃음을 짓고 있었고 난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매달 후원금을 보내지만 어린이날이나 설 추석같이 가족과 같이 하는 날엔 종종 따로 선물을 보내곤 한다. 그래서 편지로 물었다. 어린이날 선물로 뭘 받고 싶냐고. 선진이의 답장에 난 할 말을 잃었다. "문제집 사주세요" 10살 아이가 어린이날 받고 싶은 선물이 문제집이라니. 담당 사회복지사분에 따르면, 선진이는 어려운 형편에도 전교 1등을 도맡아 한다고 했다. 꿈이 의사라고 했다. 그래서, 나도 의사다, '우리 나중에 선후배 의사로 만나자'는 답장과 함께 필요하다는 문제집을 한 보따리 사서 보냈었다. 선진이가 그렇게 밝게 클 수 있었던 데는 연년생 언니 선경이의 몫이 큰 것 같았다. 애늙은이 같은 선경이의 걱정은 한 가지였다. 자기가 성인이 되기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것. 그러면 보호자가 없는 선진이와 선경이는 고아원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선경이가 드디어 성인이 되었고 대학생이 되었다. 사회복지과라고 했다. 원래는 의상 디자인이 꿈이었는데 취업을 고려해서 진로를 바꿨다고 했다. 성인이 되어 후원이 종료된 선경이는 생활비며 학비를 마련하느라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다 했지만 결국 한 학기 만에 휴학을 했다. 그런데 그런 언니를 보고 선진이가 공부를 포기했다고 했다. 사회복지과도 학비를 못 대는데 등록금이 비싼 의대는 자기한텐 사치라는 얘기였다. 안타까웠다. 부모가 원망스러울 텐데도 그렇게 열심히, 밝게 살아오던 선진이와 선경이었는데. 선진이 부모님도, 선경이 학교의 등록금도, 가진 것 없는 젊은이에게 차가운 이 세상도 새삼 원망스러웠다. 선진이를 설득하겠다고 의사가 꿈인 청소년들을 위한 꿈 멘토를 자처하고 전국 의대의 장학금 제도를 정리해서 경기도까지 강의도 하러 갔지만 그날 선진이는 오지 않았고, 결국 수능도 안쳤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렇게 선진이와의 후원이 끝났다. 고등학교 졸업식 때 입을 옷 사라고 보낸 졸업 축하금은 옷 사는 데 썼는지, 꽃다발은 들고 사진은 찍었는지, 후원이 끝나고도 선진이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얼마 전, 성인이 되어 보육원에서 나와야 하는데 살아남기가 너무 무섭다는 학생의 기사를 읽다가 선진이가 떠올라 뜬금없는 기도를 했다. 부디 세상의 선진이들이 포기하지 않기를. 선진이가 사회에 뿌리내릴 동안 선한 이웃들이 선진이에게 물을 주기를. 그리하여 뿌리내린 선진이들이 또 다른 선진이들에게 물을 주는 세상이 되기를.
손수민 영남대병원 재활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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