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설] 봉인된 대구 시월 해원(解冤), 대구시 주저할 이유 없다

1946년 대구의 10월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10월 폭동'으로 치부한 채 색안경을 끼고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문이다. 미군정의 억압에 맞서 분연히 일어선 시민 항쟁이었음에도 빨갱이로 낙인찍혀 억울하게 희생된 지난 세월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요청이다. 잊힌 과거를 애써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해원(解冤)의 과정만은 아니다. 연좌제에 몸서리친 지난날의 과오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국가 차원의 다짐이기도 하다.

1946년 대구의 10월과 1948년 제주, 여수·순천은 일정 부분 닮아 있다. 해방부터 전쟁 전후까지 이념 갈등에서 빚어진 참사였다. 피해자 진상 규명과 역사적 평가는 천양지차다. 제주 4·3 항쟁과 여순 사건의 희생을 대한민국은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특별법을 제정해 명예 회복과 보상에 한창이다. 대구 10월 항쟁은 그에 앞서 일어났고 두 사건에 영향을 끼쳤음이 하나씩 입증되고 있다. 그럼에도 대구 10월 유족은 76년 동안 속울음을 삼켜야 했다.

좌우 대립으로 희생된 당시 대구경북민들과 응어리진 상흔을 안고 살아온 후손들의 사연을 조명하는 데 그간 우리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70년 넘는 시간 동안 진상 조사에 소홀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개별적 한(限)의 집단적 발현으로 공로를 인정받자는 게 아니다. 역사적 실체를 따지자는 것이다. 대구시와 경북도도 진실 규명과 관련 기록 확보에 나설 때가 됐다고 말하는 까닭이다. 제주 4·3 항쟁의 역사적 인정에 지자체의 선제적 조사가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세월을 이기는 장사 없다. 당시를 기억하는 이들이 하나둘 숨을 거두고 있다. 기억도 가물거린다. 진실 규명은 더 어려워진다. 증언자 채록 사업이 우선인 이유다. 듣기조차 없다면 해원의 통로는 삭제된다. 물론 이질적인 구원(舊怨)이 섞여 들어갈 여지가 없지 않다. 면밀한 조사로 걸러내는 게 살아남은 이들의 의무다. 객관적 판단을 위한 증언도 듣고 가늠할 일이다. 애달픈 역사를 풀어 내는 첫 삽을 뜨는 데 지자체들이 주저하지 않길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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