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수가 이번에는 사극으로 돌아왔다. tvN 토일드라마 '슈룹'의 중전 역할이다. 그런데 이 퓨전사극을 보다 보면 여인들의 치열한 궁중 암투를 그렸던 '여인천하'도 떠오르고, 사교육 전쟁 속에서 부모와 자식들의 비극을 그린 'SKY캐슬'도 떠오른다.
◆도대체 어떤 사극이길래
tvN 토일드라마 '슈룹'은 제목부터가 심상찮다. '슈룹'은 우산을 뜻하는 고어다. 굳이 고어를 쓴 건 이 작품이 과거의 궁중을 배경으로 하는 사극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극 중에서도 특정 역사적 사실과는 상관없는 허구를 그리는 작품이라는 걸 드러내기 위함이다.
예를 들어 역사적 사실을 그리는 사극은 제목부터가 다르다. '태조 왕건'이나 '선덕여왕', '정도전' 같은 특정 역사적 인물을 제목으로 가져온 사극은 그 역사를 현재로 소환해 재조명하거나 재해석하는 작품들이다. 하지만 '슈룹', 즉 현재의 표현으로 하면 '우산'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사극은 이 사극이 갖고 있는 서사를 은유한다. 그것은 일종의 '보호막' 같은 의미다. 무엇으로부터? 궁중에 드리워진 먹구름이 몰고 올 천둥과 번개 그리고 비, 바람으로부터의 보호막이다. 그 '슈룹'은 바로 중전 임화령(김혜수)을 은유하는 표현이다.
중전 화령은 세자(배인혁)와 함께 성남대군(문상민), 무안대군(윤상현), 계성대군(유선호) 그리고 막내 일영대군(박하준)까지 모두 5형제의 어미다. 명민한 세자가 왕의 총애를 받고 있어 나머지 동생들은 하는 둥 마는 둥 학업을 등한시한다. 그것이 자신들은 야망이 없다는 걸 드러내는 일이고 맏형인 세자의 걱정을 덜어내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자가 갑자기 혈허궐(피가 부족하거나 허하여 갑자기 쓰러지는 병)로 쓰러지자 이 평화로워 보였던 중전의 위치는 한순간에 위태로워진다. 화령과 대립하며 여전히 권력욕을 가진 대비(김해숙)는 노골적으로 화령을 위협한다. 세자가 쓰러지면 정국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국본을 다시 세워야한다고 주장하고 나선다. 그러면서 은근히 후궁들의 왕자들에게도 기회가 갈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마침 세자와 함께 수학할 배동을 왕자들 중에서 뽑는다고 하자 후궁들과 그들의 왕자들은 치열한 경쟁 속으로 들어간다. 세자의 건강이 예사롭지 않은 상황이라, 그 배동 선발은 세자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그를 대신할 자리를 뽑는 자리가 되어버린다. 화령은 위기를 직감하고 대비에 의해 폐비가 된 윤황후(서이숙)를 찾아가고 그 역시 세자가 혈허궐로 사망한 후 사가로 왔지만 줄줄이 자식들을 모두 잃게 된 사연을 듣게 된다. 윤황후와 자신이 똑같은 상황에 놓였다는 걸 알게 된 화령은 자식들을 살리기 위한 궁중에서의 생존 싸움에 뛰어든다. 궁중에 내리기 시작하는 위험천만한 피바람 앞에 자식들을 보호하기 위한 '슈룹'이 되려한다.
◆'여인천하'+사극판 'SKY캐슬'
'슈룹'은 후궁들과 중전 그리고 대비 사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궁중 암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여인천하'를 떠올리게 한다.
2001년 방영됐던 '여인천하'는, 물론 궁중 여인들의 대결을 전면에 내세워 이를 드라마틱한 스토리로 풀어냈지만 엄연히 정난정(강수연), 윤원형(이덕화), 문정왕후(전인화), 중종(최종환) 같은 실제 역사적 인물들이 등장하는 사극이다. 그만큼 시청률도 화제성도 높았던 작품이다. '슈룹'에 등장하는 화령과 대비의 살벌한 대결구도나, 황귀인(옥자연) 같은 겉으로는 발톱을 숨기고 있지만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는 야망을 숨기고 있는 후궁의 면면은 '여인천하'가 갖고 있던 그 극적 상황들을 기대하게 만든다.
하지만 '슈룹'은 여기에 '자식 교육'(왕자 만들기)이라는 색다른 서사를 덧붙인다. 후궁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야망을 자기 자식들을 통해 투영한다. 배동 선발 시험을 위해 거벽(현재의 코디네이터 역할)을 붙이고, 이들을 통해 예상 문제와 답안을 알려주는 일종의 '족집게 과외'도 시킨다. 그걸 대놓고 할 수 없는 화령은 어쩔 수 없이 본인이 직접 나서서 출제예상 문제를 찾아 일일이 서책들에 체크해 아들들에게 알려준다. 그걸 화령은 '가정교학'이라고 표현하는데 사실상 현대의 홈스쿨링을 패러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거벽이나 가정교학 같은 자식 교육의 이야기는 현대극의 이야기를 사극 버전으로 가져와 패러디한 내용들이다.
그래서 다소 코미디로 재해석된 이 치열한 사교육 경쟁은 어딘가 사극판 'SKY캐슬'을 떠올리게 한다. 더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범법까지도 불사하는 코디네이터를 채용하고 그것 때문에 비극을 맞이하는 이야기가 바로 'SKY캐슬'이 아니었던가. 자식 교육에 목숨을 거는 부모들의 이야기만큼 '슈룹'의 중전이나 후궁들의 이야기도 치열하다. 그것은 이 사극 속 자식 교육은 경쟁력을 갖춰 왕과 신하들 앞에 서지 못하면 자칫 궁 밖으로 쫓겨나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하기도 하는 '벼랑 끝' 위기감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김혜수의 원맨쇼에 의외의 인물, 서사까지
'슈룹'은 제목에 담긴 것처럼 '우산'을 상징하는 중전 화령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드라마가 방영되기 전 티저 영상으로 나왔던 '궁중에서 가장 빨리 걷는 중전'이라는 이 캐릭터에 대한 소개가 사실상 이 작품을 가장 간결하게 설명해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화령이 마치 경보라도 하듯이 빠르게 걷는 모습은 우스꽝스러운 코미디의 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이 작품이 역사와는 상관없는 퓨전사극이라는 걸 드러내준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한 화령의 절박함도 묻어나 있다. 자식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어미의 절박함이 그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슈룹'은 김혜수가 전면에서 웃기다가 절절하다가 때론 잔뜩 긴장하게 만드는 식으로 거의 원맨쇼에 가깝게 드라마를 끌고 간다. 물론 이러한 극성을 만들어내는 또 한 축은 화령과 대결하는 대비의 압도적인 카리스마다. 영의정 황원형(김의성) 같은 정치의 실세조차 쥐락펴락 하는 대비가 시시각각 화령을 위협하는 막강한 존재로 서 있기 때문에 '슈룹'은 추동력을 얻는다.
하지만 '슈룹'에는 이들의 궁중 암투 서사만이 아니라, 왕자들 간의 배동 선발 시험 대결 같은 일종의 오디션 방식의 당락으로 끌고 가는 이야기도 들어 있다. 또, 위기의 순간에 등장해 존재감을 드러내는 성남대군(문상민) 같은 인물도 있고, 마침 창궐한 역병 한가운데로 들어가 환자들을 돌보는 마치 '허준'의 한 토막을 연상케 하는 토지선생(권해효) 같은 인물도 있다. 토지선생을 통해 처방을 받아 가까스로 혈허궐로 쓰러진 세자를 일으켜 세웠지만, 결국 세자가 다시 피를 토하고 쓰러지게 된 대목에서는 이제 '독살'과 관련된 추리 서사 또한 기대감을 갖게 만든다. 즉, 김혜수의 원맨쇼라는 바탕 위에 의외의 인물과 서사가 더해지면서 '슈룹'은 앙상하지 않은 이야기를 풀어낸다.
물론 '슈룹'은 역사와는 상관없는 허구라고 밝혔지만 중국풍을 연상시키는 '고증 문제'가 논란을 불러일으킨 오점도 드러난 드라마다. 요즘처럼 한중관계가 예민한 상황 속에서 이러한 고증 문제는 제작진이 무겁게 받아들이고 수용해 수정할 건 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고증 문제로 인해 작품이 그리려고 하는 색다른 세계 전부를 부정당하는 일은 과하다고 여겨진다. 이런 부분들이 수용되고 수정된다면 '슈룹'은 충분히 현재적 의미를 갖는 퓨전사극으로 가치를 갖는 작품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사극이 과거의 재현이 아닌 현재의 관점이 투영된 재해석으로 가고 있는 요즘, '슈룹' 같은 재기발랄한 상상력은 K콘텐츠의 미래를 위해서도 보다 적극적으로 열어 둬야 한다. 물론 그럴수록 철저한 고증은 필수적이어야 하지만.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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