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조양회관 100년을 맞아

정인열 대구독립운동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홍보협력위원장

정인열 대구독립운동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홍보협력위원장
정인열 대구독립운동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홍보협력위원장

'아침 해가 비치는 곳, 조양회관(朝陽會館)'은 지금 대구 망우당공원에 있다. 1922년 4월 1일 착공, 그해 10월 30일 준공됐으니 30일로 100년이 됐다. 대구 달성공원 앞(옛 원화여고 자리)에 들어섰던 조양회관은 대구의 젊은이, 애국지사, 시민들에게는 '아침에 비치는 해'와 같았다.

일찍 독립운동에 뛰어든 37세의 젊은 자산가 서상일은 1919년 대구 3·8만세운동 이후 사람들이 모여 의기투합할 공간의 절실함을 깨달았다. 자기 땅 1천650㎡을 내놓았고 대구 유지들이 십시일반 분담을 약속했다. 벽돌은 3·8만세운동 참여자 백남채의 벽돌공장에서 가져왔다. 설계는 허무당선언자 윤우열 독립운동가의 형이자 서상일의 절친 윤홍열과 7촌 간으로 대구 근대건축의 길을 연 윤학기(개명 윤갑기)가 맡았다.

일제의 방해로 유지들의 분담금 약속이 무산되자 서상일은 논밭까지 팔아 건축비 4만3천80원50전(당시 쌀 1가마 30원·현재 2억~3억 원)을 댔다. 열혈지사 서상일(동생 서상한도 일본 동경 폭탄 투척사건으로 투옥된 독립운동가)의 민족 자본으로 세운 최신식 건물이었다. 2층 건물에 1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도 갖췄다. 1922년 당시 대구 한국인 3만8천265명의 2.6%를 동시에 모을 수 있으니 뭔가(?)를 꾸미고 전파하기에 딱이었다.

회관에는 대구에서 활동하던 민족시인 이육사, 이상화의 맏형 이상정 독립운동가, 정칠성 사회주의 여성독립운동가 등 열혈 청년, 애국지사들의 발길이 잦았다. 건물에는 농촌사, 대구구락부, 대구여자청년회, 대구운동협회, 동아일보 대구지국 등 기관·단체가 입주했으니 시민들의 발길은 당연했다. 요절 시인 이장희 추모회, 신간회 대구지회 창립총회, 음악회, 대규모 (정기)강연회, 전시회 등으로 회관은 대구의 사회, 문화, 청년운동의 중심 행사터였다.

대구부립도서관 입주, 일제 병사부(보급부대) 사무실 개소 등으로 조양회관은 굴곡의 역사를 피하지 못했다. 민족문화 말살 탄압과 동아일보 폐간으로 서상일의 동아일보 대구지국 폐쇄 수난도 겪었다. 광복 뒤 정당 사무실 등이 됐다가 결국 1953년 원화여중고 설립으로 인재 양성 학교로 변신했다. 초대 교장은 일제 때 신문 배달을 하던 서상일 사위 이응창(변호사 이인 애국지사 당숙이자 독립운동가 이시영 외아들) 아동문학가였다.

조양회관은 또한 일제 때 대구감옥(형무소)에 갇힌 광주(호남) 항일운동 학생들이 출감 사진 촬영차 달성공원(독립운동 비밀 결사 결정지)을 드나들 때 지켜본 남다른 곳이었다. 그들에게 조양회관은 1921년 광주 부호 최상현이 부친(최명구) 회갑연 비용을 아낀 8천 원을 들여 만든 광주 항일운동의 요람인 흥학관과 같은 맥락의 건물이었다. 그들은 조양회관에서 자신들의 활동터였던 흥학관을 떠올렸을 법하다.

이런 대구 근현대사의 사연이 깃든 조양회관은 1980년 원화여중고가 달서구로 옮기면서 1984년 6월 9일 현재 터에 이전 복원됐다. 광주 옛 흥학관은 개발 과정에서 없어져 오늘날 아쉽게 생각하는 것과 달리 조양회관은 원형대로 보존했으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대구의 소중한 문화재이자 역사 자산의 가치마저 더해진 건물로 평가받을 만하다.

100년 조양회관의 역사와 가치를 되돌아볼 수 있는 학술연구는 늦었지만 필요하다. 대구 역사 자산을 되살려 엮고 미래 디딤돌로 삼는 노력은 어느 누구·기관·단체에 미룰 일이 아니다. 대구 사회 구성원 누구라도 관심 갖고 머리를 맞댈 일이다. 그런 일에 한 보탬이 되면 더 바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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