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글로 써보자"라는 내 말에 아이들은 당황했다. 그런 말은 들어본 적도 없고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고 했다. 그럼 이참에 한번 해보라고 했다. 난감해하던 아이들은 시간이 좀 지나자, 나는 결정을 잘 못 한다, 못 생겼다, 착하다 같은 문장을 적기 시작했다. 그런데 유독 한 아이만 생각에 잠긴 채 가만히 있었다. 내 시선을 느낀 아이가 마지못해 입을 열어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제겐 두 개의 얼굴이 있어요. 제 속에 있는 얼굴과 남 앞에 꺼내는 얼굴 중 어느 것에 대해 써요?"
내가 봉사하러 가는 지역 아동 센터에는 많은 아이가 있다. 그중 내가 맡은 팀은 초등학교 3학년 여학생 네 명으로 구성된 그룹이다. 봉사의 명분은 '글쓰기를 가르치는 것'이지만 사실은 아이들 얘기에 귀기울여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목적이다. 네 아이는 모두 외국인 엄마와 한국 아빠 사이에서 태어났고, 현재 그 엄마들은 아이 아빠와 헤어지고 같은 국적의 남자와 사실혼 관계에 있다. 그래서 아이들에겐 두 명의 아빠가 있고, 아빠가 다른 동생이 있다. 엄마의 국적만 다를 뿐, 네 아이의 사정은 모두 같았다. 동생을 돌봐야 한다던가 가족의 통역을 이유로 아이들은 자주 결석했고, 말은 능숙했으나 글은 서툴렀다.
무엇이 열 살 여자아이를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철학자로 만들었을까. 이 아이는 어떤 정체성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 것일까. 한국에서 자란 아이와 아프리카에서 자란 아이의 정체성은 다르다. 같은 나라에서 자랐다 해도 부모의 국적이 다르다면 얘기가 또 달라진다. 그런데 이 아이들의 경우는 '다른 문화권'이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한, 훨씬 복잡한 문제가 있다. 피의 반을 물려준 한국 아빠와는 떨어져 지내면서, 자신을 제외하고 혈통과 피부색이 같은 가족과 그들의 언어를 쓰면서 생활하다가, 집 밖으로 나오면 한국어로 쓰고 배우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 파울 페르하에허는 정체성은 존재보다 성장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고, 성장은 탄생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외부 세계의 영향은 뇌구조까지 바꿀 수 있으며 따라서 정체성은, 타인들이 우리 몸에 새겨 넣은 출신과 운명에 관한 견해의 총체라는 것이다. 이 아이의 정체성 형성에는 타인이 있었다. 그 타인은 가족이고 선생님이고 친구였고, 때로는 한국이라는 이 땅 자체이기도 했다. 아이는 자신의 말과 행동에 반응하는 그들의 태도를 보면서 조금씩 다른 얼굴을 만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다 마침내 알게 되었으리라. 어떤 얼굴을 해야 거부나 외면 당하지 않는지, 어두운 구석으로 내몰리지 않고 살아남는지를.
얼마 전 '편지 쓰기'를 했다. 올해 마지막 수업이었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쓰게 했고, 쓴 편지를 아이들과 함께 우체국에 가서 부쳤다. 며칠 후 편지가 도착했다. 선생님 사랑해요, 감사합니다, 보고 싶어요 같은 내용 속에서 얼굴이 두 개인 아이의 편지가 눈에 띄었다. 거기엔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선생님과 수업이 끝났지만 저는 하나도 슬프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때 동안 기뻤으니까요.' 철학자라는 내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다. 이 소녀는 '깨달은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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