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라고 하면 흔히 점잖고 학식이 풍부하지만 음악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선입견과 달리 선비는 학문과 예술을 두루 섭렵하고 통합적 이해를 추구한 교양인이었다. 이들에게 학문과 예술은 조화를 이루고 있는 하나의 세계였으며, 음악은 음에 대한 탐구를 통해 삶의 궁극적 의미를 고민하고 존재를 한 차원 높이 이끄는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선비들은 학자이면서 문인이고 화가이면서 음악인이었다. 특히 시는 가창을 위한 것으로 시와 악은 직결되어 있었다. 선비들은 학문과 예술이 서로 간섭하고 협조하는 작용을 통해 보다 입체적인 학문의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이들은 논리적이고 지성적인 능력과 감성적이고 예술적인 능력을 두루 겸비한 통합적 인간, 전인을 추구했다.
'논어'에서는 도에 뜻을 두고, 덕을 지키며, 인에 의지하고, 예를 체득하며, 시로 감흥을 일으키고, 예로 기준을 세우며, 음악으로 완성(成於樂)하라고 했다. 음악의 도야를 통해 인격을 완성하라는 뜻이다. 이에 따라 거문고는 선비의 사랑채에 필수품이었다. 거문고는 소리가 굵고 남성적이며 선비의 기상과 정신을 표현한다고 하여 군자의 악기라고 했다. 선비들은 수양과 평정을 위해 거문고를 가까이 두고 앞판이나 뒤판에 악기를 타는 마음가짐과 글귀를 새겨 연주할 때마다 심신을 바르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은 소리의 미학적 체험을 통해 이상적인 인격을 함양하고자 했다.
선비의 음악은 가곡과 가사, 시조, 영산회상 등이 주요 장르이다. 선비들은 가곡, 가사, 시조에 뛰어난 사람을 가객, 거문고에 뛰어난 사람을 금객, 시에 뛰어난 사람을 시객, 서화에 뛰어난 사람을 묵객이라 하고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조선 후기에는 실학자를 중심으로 한 양반 계층과 예술적 소양을 지닌 중인 지식층, 악사들이 풍류방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풍류방은 시를 짓고 노래하며 영산회상 합주를 하는 등의 악회가 열리는 곳으로, 상공업의 발달로 부를 축적한 중인은 조선 후기 새로운 문화 향유층으로 나타나 관념적인 음악 문화가 심미적으로 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선비의 음악은 백성들이 즐기는 판소리, 잡가, 농악 등의 민속악과 구분이 된다. 한껏 내지르고 직설적인 내용을 담는 민속악과 달리 선비의 음악은 절제와 조화의 미를 추구했다. 속악이 변화가 풍부하고 흥과 신명을 표현하며 역동적인 데 비해, 선비의 음악은 장중하고 변화가 적어 관조와 조화의 세계를 표현했다. 느린 음악은 세계의 폭을 확장하고 깊은 성찰을 가능하게 하며 공간의 미를 만들어낸다. 이 공간은 개방성과 초월성을 의미하며, 동양화에 나타나는 여백의 정신과 뜻을 같이 한다. 이는 '비우는 것이 완성하는 것'이라는 노자의 미학과 연결된다.
선비들의 음악은 오락성보다 사무사(思無邪)와 정인심(征人心)을 추구했다. 정악은 희유의 개념을 넘어 미를 진리와 도에 연결하며 정서적인 것에서부터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면까지를 두루 포괄한다. 선비는 이를 바탕으로 거대한 우주 속의 '보편적 존재자'로서의 자신을 인식했다.
서영처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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