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화요 초대석] 준비의 실패는 실패의 준비다

김영수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영수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영수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긴 신음 소리를 내며 한 어머니가 시멘트 바닥 위로 무너져 내렸다. 부모는 자식을 가슴속에 묻는다고 한다. 그렇게 지난 29일 저녁, 154명의 꽃다운 생명이 스러졌다. 세월호 같은 사건을 이 땅에서 다시 겪을 줄 몰랐다. 그때 온 국민은 가슴을 치고 어린 생명들을 생각하며 울었다. 그런데 눈 떠 보니 선진국이라던 나라의 수도 한가운데서 어떻게 이런 일이 또 일어날 수 있나.

이제 와 누구의 책임을 묻는 건 부질없는 일이다. 하지만 정말 그 일을 미리 막을 수는 없었는지, 생때같은 젊은이들이 그처럼 많이 죽어야만 했는지 거듭 묻지 않을 수 없다. 사건의 전조는 차고 넘쳤다. 핼러윈 시즌이면 이태원에 인파가 몰린 지 오래됐다. 사람이 시루 속 콩나물처럼 빽빽이 몰려, 밀려 쓰러지면 죽을 것 같다는 이야기도 7~8년 전부터 나왔다. 올해는 더욱이 3년 만에 노 마스크 축제였다. 사고가 일어난 골목에는, 이미 오후 6시 30분경부터 병목현상이 생겼다. 사람들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옴짝달싹도 못 했다. 발이 땅에 닿지 않으면 이미 위험한 상태다. 대열에 낀 약한 여성들이 선 채로 질식했다.

폭 6m, 길이 20m, 면적 120㎡의 길에서, 보행자의 흐름과 압사 사고를 시뮬레이션한 연구가 있다. 이 면적에 보행자가 800명이면 충돌이 계속되고 통제 불가능에 빠진다. 사고가 난 골목길은 폭 3.2m, 길이 40m, 면적 128㎡였다. 여기에 1㎡당 약 12명, 총 1만6천384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인파가 밀집했다. 보통 사람 눈에도 폭탄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주변에 경찰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3시간 이상 그런 상태가 방치되다가 마침내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

그러나 일단 사고가 신고되자, 5~7분 만에 소방차가 도착했다. 구조대원과 의료진도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세월호 이후 긴급 의료 시스템은 잘 정비되었다. 하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다. 좁은 골목에 겹겹이 쌓인 사람을 쉽게 꺼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골든타임은 심정지 후 4분이라고 한다. 그 짧은 시간에 구조가 가능할 리 없다. 결국 예방 외에는 답이 없는 것이다.

경찰도 29일 오전에 이미 10만 명 이상이 모일 걸로 예상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구 이동을 실시간 모니터링하면서, 최소한 이태원 인근 지하철역을 무정차 통과시켜야 했다. 얼마 전 여의도 벚꽃축제 때도 그랬다. 재난안전문자도 보내고, 방송도 할 수 있었다. 밀집된 인파를 통제했다면 최선이었을 것이다. 2017년에는 폴리스라인을 치고 통제했다. 불과 보름 전 이태원 지구촌축제 때도 그 골목에 사람이 밀집했다. 그때는 일방통행으로 보행을 통제했다. 이번에도 경찰 두 명만 있었으면. 인근 상인의 눈물 어린 말이다. 일본 경찰이 그랬다. 도쿄 시부야의 핼러윈 축제에도 100만 명이 모였다. 하지만 일본 경찰은 DJ폴리스를 설치하고, 경비차 위에 올라 방송을 하며, 인파를 적극 통제했다.

용산구청과 용산경찰서, 서울시는 무얼 했나. 준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방향이 완전히 빗나갔다. 구청은 방역과 청소, 경찰은 마약 등 범죄 예방에 초점을 맞추었다. 서울시는 대책이 전혀 없었다. 시민조차 느낀 위험을 현장의 직원과 경찰이 알아차리지 못한 것도 불가사의다.

핼러윈 축제는 주최가 없고 시민이 스스로 참여한 것이다. 재난안전관리기본법만 보면 정부의 법적 책임을 묻기 힘들다. 하지만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라고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찰이나 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던 문제는 아니었다"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발언은 선을 넘었다. 그럼 국가가 왜 필요하나. "그전과 비교할 때, 특별히 우려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모였던 것은 아니다"라는 말은 전형적인 안전불감증이다. 안전사고 대책은 최악을 가정해 세우는 것이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엄중하게 대처해 달라." 지난 9월, 윤석열 대통령이 태풍에 대해 이 장관에게 한 당부다. 더욱이 이태원의 헬러윈 행사는 언제 사고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임계점에 달한 상태였다.

세월호 참사를 '고맙다'고 한 정부를 더는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둔감한 정부도 더는 보고 싶지 않다. 준비에 실패하면, 실패를 준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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