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칼럼] 수십년 공부 시늉만…결과는 까막눈 행정

참사를 목격하면 다른 참사가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펼쳐지는 것이 기자의 직업병이다. 2일 기준으로 156명이 숨진 서울 이태원 압사 참사 사건을 보면서 192명의 희생자를 낸 2003년 2월 18일 대구지하철 방화 참사가 떠올랐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대부분 기억을 놓쳐 버렸지만 이번 사건을 보면서 일본 기자들과의 만남 장면이 기억 회로에 잡혔다. 2003년 대구지하철 방화 참사 당시 기자는 일본 기자들을 현장에서 다수 목격했다. 우리나라에 상주하는 특파원이 아니라 본사에서 출장 온 기자들이었다.

영어와 서툰 일본어, 보디랭귀지까지 뒤섞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일본 기자들의 출장 목적을 취재해 봤다. 철도의 나라 일본답게 지하철 사고의 발생 및 대처 과정, 그리고 정확한 원인을 꼼꼼하게 취재해 갈 목적이라는 게 그들의 설명이었다.

지하철 방화 참사 취재 당시 만났던 일본 기자들과의 만남 기억을 소환한 이유는 핼러윈데이를 맞이한 일본 경찰의 대응을 보면서다.

이번에도 확인됐지만 우리나라는 그동안 서울 이태원이나 명동, 대구 동성로처럼 번화가에서 순간적으로 많은 보행자들이 몰리는 현상에 대한 대처가 어처구니없는 수준이었다. 자동차가 많으면 교통경찰이 오지만 사람이 밀집할 경우, 인파 관리에 대한 대응에 대해 아예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높게 제작된 경찰차량에서 거리 상황을 내려다보며 사람들이 한쪽으로 몰리지 않도록 유도하는 'DJ폴리스'의 활약이 핼러윈데이에 목격되는 등 거리에서의 인파 관리라는 개념이 명확히 존재했다.

일본은 2001년 7월 21일 효고(兵庫)현 아카시(明石)시에서 일어난 압사 사고 이후 비슷한 사고의 재발을 막기 위해 다양한 인파 사고 대비책을 만들어왔다. 그 당시 바닷가 불꽃놀이 행사에 온 사람들이 좁은 다리를 지나다 겹쳐 쓰러지면서 11명이 사망하고 247명이 중경상을 입는 참사가 일어났었다.

"참여정부 출범 직전의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사상자는 남북 간 군사적 충돌로 인한 사상자 숫자보다 훨씬 많았다. 그것을 보면서 국방 안보도 중요하지만 국민들의 안전을 지키는 것도 국방 안보 못지않게 중요하겠다라는 포괄적 안보 관념을 가졌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비서실장 출신인 문재인 전 대통령이 취임 직후였던 2017년 5월 26일 청와대에서 국무위원들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했던 발언이다. 국민 안전을 위해 노무현 정부가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센터를 두게 된 과정을 설명하면서였다.

문 전 대통령이 국무위원들을 모아 놓은 자리에서 노무현 정부의 재난 대응 업적에 대해 거창하게 설명했지만, 사실 노무현 정부는 정부 출범 초기부터 재난 대처와 관련해 국민들로부터 크게 꾸중을 듣기도 했다. 대구경북은 물론 전국적으로 역대 최대 피해를 냈던 2003년 9월 12일, 태풍 매미 상륙 당시 관계 공무원들이 비상 대기를 한 상태에서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뮤지컬 관람을 했다. 이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은 여론의 뭇매를 맞았고 대국민 사과까지 해야 했다.

일본처럼 대형 참사를 겪었을 때 정부는 물론, 언론까지 혼연일체가 돼 원인을 철저히 공부했던 나라는 같은 참사를 반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재난 앞에서 우리 행정은 수십 년 동안 공부하는 시늉만 해왔을 뿐이었다. 그 결과물은 사람 잡는 까막눈 행정이었다.

학구열이 전혀 보이지 않는 까막눈 행정을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다. 국민을 깔보는 공직사회의 무사안일을 수술대에 올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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