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시인의 천명, 백석과 프랑시스 쟘

손진은 시인

손진은 시인
손진은 시인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백석의 '힌 바람 벽이 있어'에 나오는 구절이다. 다음 구절에 그가 흠모해마지 않았던 '프랑시스 쟘'이라는 시인의 이름이 나온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와 함께 '쟘'을 슬픈 운명 속에 놓인 것으로 자기화하는 것이다. (윤동주가 '별헤는 밤'이라는 시에서 프랑시스 쟘을 언급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시인이란 이렇듯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아야 하는 천명에 놓인 것을! 프랑시스 쟘과 백석은 본연적으로 맑은 영혼이다. 그들의 시편들을 읽노라면 저절로 무릎이 꿇어진다. 그들은 기교를 별로 부리지 않는다. "오래된 찬장도 하나 있는데, 그건/충직한 하인이다"(쟘, '식당'), "가죽 포대같이 통통한 암컷"(쟘, '나귀와 함께 천국에 가기 위한 기도'), "국수집에는 농짝같은 도야지를 잡아걸고"(백석,'북신') 같은 투박한 표현에 쿡쿡거리다가도 이내 마음이 처연해온다. 주변의 사물들과 외롭고 힘없는 동물, 인간들에 대한 연민을 불러내기 때문이다. 두 시인의 정서가 많은 시에서 '슬픔' 쪽으로 향하고 있는 이유이다. 쟘은 "자연적인 것에는 매미, 백합, 가문, 왕관과 슬픔도 있다"고 말하고, 백석도 덩달아 "서러워졌다, 서러워한다,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이란 말을 여러 시편들에서 쓴다.

그 정서는 주변의 상처 입은 동물과 인간으로 향할 때는 걷잡을 수 없이 '북받치는 슬픔'을, 자신에게로 향할 때는 '정제된 슬픔'을 취하게 된다. 모든 '산 것'들의 비애라는 체험적 진실 앞에서 인간은 에둘러갈 수 없는 직서적 표현밖에는 내뱉을 수 없다. 쟘과 백석의 시편이 가장 단순하면서도 진한 감동을 주는 것은 삶의 과정에서 만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지극한 연민을 가진 시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용한 시간 자신을 대면할 때 그들은 유연하고 너그러운 시적 호흡 속에서 생의 고통을 수용하고 긍정하며 찬찬히 그것을 가라앉힌다. "내 개 두 마리가 날고 있는 파리를/삼키려고 노려보고 있는 동안/나는 내 괴로움을 대단찮게 생각하게/되었고, 체념이 내 영혼을/슬프게 가라앉히는 것이었다"(쟘, '조용한 숲속에').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내 어리석은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백석,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외부의 광경과 내부의 생각이 상호 침투하여 감정을 정화시키면서 호소력을 자아낸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이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슬픔이 비로소 서늘하고 투명한 아름다움과 정신적 깊이를 가지는 순간이다.

제대로 된 시인이 드물어진 시대에 오늘 무릎을 꿇고 "시인이란 슬픈 천명"(윤동주, '쉽게 쓰여진 시')임을 알았던 두 시인의 '슬픔'에 몸을 데인다. 젊은 날에 시에 붙들린 이래 나는 무얼 바라 아직까지 시를 쓰고 있는가? 슬픔으로 한 영혼을 일으켜 투명하고도 맑은 균형의 지점에까지 세운, 정직하게 살다 간 외로운 그 영혼들에게 받았던 진실과 감동을 미지의 독자들에게 돌려주게 되는 날은 언제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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