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노동일 칼럼] 지금은 침묵할 때

노동일 경희대 교수

노동일 경희대 교수
노동일 경희대 교수

"너무 아프고 쓰라려 울음이 복받치더군요. 여기서 울면 안 돼. 나는 황급히 은하계 주문을 외려고 했죠. 소용이 없었어요. 은하계 그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더라구요. 저는 드디어 울음이 복받치는 대로 저를 내맡겼죠. 제가 그렇게 많은 눈물을 참고 있었을 줄은 저도 미처 몰랐어요. 대성통곡, 방성대곡보다 더 큰 울음이었으니까요. 제 막혔던 울음이 터지자 그까짓 은하계쯤 검부락지처럼 떠내려 가더라구요. 은하계가 무한대건 검부락지건 다 인간의 인식 안에서의 일이지, 제까짓 게 인간 없이는 있으나 마나 한 거 아니겠어요."(박완서,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지난주 서울시청 앞에 마련된 이태원 참사 희생자 분향소에 들렀다. 늦은 시간이어서 함께 조문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하나같이 침통하고 울고 싶은 표정이었다. 나도 그들도 고인들과 무슨 친분이 있겠는가. 같은 시기에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이유 하나로 답답하고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방명록을 쓰라고 안내하는데 할 말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그냥 나오기도 뭣해서 애도의 뜻과 함께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우리야 남이니 그 정도로 그치면 된다. 대부분 젊은이인 고인의 시신을 접한 부모 심정은 어떨까.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 그 어떤 말로도 감히 그들의 심경을 헤아리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참혹할 참(慘)에 슬플 척(慽)을 쓰는 '참척'이라는 말도 '자식 잃은 부모'의 '너무나도 참혹하고 슬픈 감정'을 묘사하지 못한다.

고 박완서 작가도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이다. 뜻하지 않은 병으로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돼 아들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목숨을 잃는 황망한 일을 겪었다. 자기는 물론 다른 가족, 심지어 신을 포함한 온 세상이 미움과 원망과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 아들이 죽었는데도 멀쩡히 살아 있는 자신부터 용납이 안 된다. 극한 슬픔 가운데도 배가 고프고 밥을 먹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하는 인간 존재 자체가 혐오의 대상이다. 멀쩡히 살아서 제 할 일을 하는 다른 가족들도 꼴보기 싫고 미운 감정이 든다. 아들이 없는데도 해가 뜨고 해가 지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세상이 잘 돌아가는 게 이해가 안 된다. 수시로 너무 아프고 쓰라려 울음이 복받치는 때면 "그렇게 많은 눈물을 참고 있었을 줄은 미처 몰랐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울게 되는 게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모르는 신의 뜻이 있겠지요, 좋은 곳으로 갔을 거예요, 산 사람은 살아야지요…. 세상의 그 어떤 미사여구도, 위로도 오히려 가족들의 가슴을 아프고 쓰라리게 만드는 말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이야말로 모두가 침묵해야 할 시간이다. 위로의 말, 애도의 뜻만을 표해도 부족할 시간이다. 함께 울고 함께 손을 잡아 주어야 할 때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마치 '때는 이때다'라는 듯 더러운 오물부터 던지기에 여념이 없는 이들이 있다. 예견된 참사, 예상 가능한 사고, 막을 수 있었던 사고라고 떠드는 언론들부터 그렇다. 당일 참사 직전까지 '이태원 핼러윈'을 홍보하기에 바빴던 자신들의 과오에는 눈감은 채 말이다. 남영희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 부원장은 청와대 용산 이전이 참사 원인이라며 '윤석열, 오세훈 퇴진'부터 들고나왔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 방한 시 자동차 행렬을 윤석열 대통령 출퇴근 장면이라고 올린 가짜 뉴스를 링크하기도 했다. 종류와 수위는 다르지만 진영 간 대결로 몰아가며 정치적 이용에 골몰하는 사람들은 부지기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라는 우리말이 이처럼 정확하게 들어맞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비정해야 정치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정치를 하다 보면 비정해지는 것인가 의구심이 든다. "제까짓 게 인간 없이는 있으나 마나 한 거 아니겠어요"라는 말을 새겼으면 싶다.

사고 원인을 철저히 파악한 후 책임자 문책, 재발 방지 대책 마련도 해야 한다. 나도 이런저런 할 말이 많다. 하지만 모든 것은 때가 있다. 지금은 조용히 유가족들의 슬픔과 함께해야 할 시간이다. 생면부지 사람들과 함께 조문하면서 그들과 차 한 잔 놓고 대화라도 나누고픈 묘한 연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그런 마음으로 모두가 침묵할 때이다.

문화부 jeb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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