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중(盤中) 조홍(早紅) 감이 고아도 보이나다
유자(柚子) 안이라도 품엄즉도 하다마난
품어가 반기리 업슬 새 글로 설워하나이다
영천 출신으로 가사문학 발전에 이바지한 노계 박인로의 시조 「조홍시가」(早紅柹歌)다. 이덕형(李德馨)이 도체찰사로서 영천에 왔을 때에 홍시를 보내주자 연시조를 지었다고 한다.
요즘 말로 풀어보면 '소반 위 일찍 익은 붉은 감 곱기도 하다/ 유자가 아니라도 품고 갈 만 하지만/ 품고가도 반길 사람 없으니 서럽구나'라는 뜻이다. 중국 삼국시대 육적의 '회귤'고사를 인용하며 여읜 어머니를 생각하는 효심을 느낄 수 있다.
가을이면 시골에는 홍시가 지천이다. 농촌이나 산촌 곳곳에 이파리보다 더 많은 감을 주렁주렁 매단 감나무가 탐스럽다. 빨갛게 잘 익은 홍시는 늦가을에나 맛 볼 수 있는 별미로 정겨운 고향 정취를 느끼게 한다. 곶감과 홍시는 간식거리가 부족했던 시절 겨울에 먹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소중한 먹거리였다.
다디단 곶감은 옛날 우는 아이를 달래는 데 최고였다.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호랑이에게 물려간다고 겁주어도 막무가내이던 아이가 곶감을 준다고 하자 울음을 멈췄다. 이를 엿들은 호랑이가 자기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있는 줄 알고 놀라 줄행랑을 쳤다는 전래동화가 '호랑이와 곶감' 이야기다.

5, 6월 모내기가 막 시작될 무렵에 피는 연황색 감꽃을 먹기도 했는데 맛은 약간 들쩍지근했다. 통꽃을 실로 꿰면 목걸이가 되는데 어린 아이들에게 선물했다. 남아선호사상이 유별났던 그 옛날 부녀자들이 감꽃 목걸이를 목에 걸면 아들을 낳는다는 주술적 속설도 있었다.
7~9월에는 아직 덜 익은 땡감을 소금물에 담가 떫은맛이 가시면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흰색이나 단색 옷을 입고 땡감을 가지고 놀다보면 옷에 감물이 들고 얼룩이 지워지지 않아 어머니로부터 꾸지람을 듣던 기억도 새록새록 난다. 그 때는 감물이 옷을 더럽히는 줄로만 여겼는데 청도나 제주도에서는 무명의 천연 염색에 쓰고 있다. 감물 염색은 방부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땀에 젖어도 옷에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750년 된 최고령 상주 감나무
감나무는 삼국시대 이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문헌에는 고려 중기에 간행된 의약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 나온다. 조선 초기에도 경상도 고령에서 재배한 기록이 전해온다. 『세종실록』 「오례」를 보면 종묘에 천신(薦新)할 때 10월의 과일에 감이 들어있다. 또 성종 때 간행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감을 중추 제물로 사용한다고 했다. 옛사람들은 밭둑에 대추나무를 심고 산자락엔 밤나무, 집주변에는 감나무, 숲속엔 돌배나무를 심어 제사상에 올릴 과일 '조율시이'(棗栗柹梨)를 챙겼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감의 주산지로 합천, 청도, 거창, 의령, 창원 등을 꼽고 있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에 들어있는 식품 품평서인 「도문대작」(屠門大嚼)에는 감 종류로 온양의 조홍시(早紅柹), 남양의 각시(角柹), 지리산의 오시(烏柹·먹감)를 들고 있다.
누에고치와 쌀 그리고 곶감으로 유명한 '삼백의 고장' 경북 상주시에는 수령 750년 된 감나무가 있다. 외남면 소은리에 있는 보호수 '하늘 아래 첫 감나무'는 고욤나무에 접을 붙인 국내 최고령 접목이다.
상주는 조선 『세종실록』 150권 지리지 「경상도」편에 "이 지역의 주요 공물로 곶감이 있다"는 기록과 『예종실록』 2권 즉위년(1468년) 11월13일 기사 편에 "지금 곶감의 진상을 상주에서 나누어 정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상주 곶감의 오랜 역사와 명성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상주의 감은 주로 곶감용으로 쓰이는 길쭉한 모양의 둥시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인 '감쪽같다'의 어원도 감나무와 관련돼 있다. 사전적 의미는 '꾸미거나 고친 것이 전혀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티가 나지 아니하다'는 뜻인데 바로 감나무 접붙이기에서 나온 말이다.
씨를 바로 심어 자란 나무에서 열린 감은 작고 볼품없기 때문에 좋은 열매를 생산하기 위해 고욤나무를 대목으로 삼아 접붙인다. 여기서 파생된 말이 '감쪽같다'라는 말이다.
경상도 일부지역에서는 '깨양나무'라고도 부르는 고욤나무 줄기에 접붙이고자 하는 감나무의 눈이 달린 가지를 붙이고 끈으로 칭칭 감아 두면 이듬해 봄에 줄기와 가지가 착 달라붙어서 표시가 잘 나지 않는다. 그래서 감접을 붙인 것처럼 흔적이 없는 상태를 '감접같다'고 표현했고, 실제 '감접같다'는 단어가 1947년판 『조선말큰사전』이나 그 이후에 나온 몇몇 큰 사전에 실려 있었다. '감접같다〉감쩝같다〉감쩍같다'의 변화 과정을 거쳐 '감쪽같다'는 말로 정착됐다.

◆먹감나무 골프 채 헤드로
50, 60대 이전 세대가 어릴 때만 해도 감나무에 올라갔다가 가지가 부러지면서 떨어져 크게 다치는 사고가 간간이 일어났다. 어른들은 감나무에서 떨어지면 3년 안에 죽거나 중상을 입는다고 가을이 되면 아이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킨다. 나뭇가지가 질기지 못해 가지가 쉽게 부러지는 까닭에 행여 감 따러 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질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당부다.
먹감나무는 느티나무, 오동나무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우량 목재로 꼽힌다. 검은색이 진하고 나무속이 단단한 먹감나무는 문갑이나 탁자를 만드는 소재다. 금속재료가 나오기 전에 골프 채 우드의 헤드나 요즘 유행하는 파크골프 채의 헤드, 당구 큐도 감나무로 만들었다.
당(唐)나라 단성식(段成式)이 엮은 책 『유양잡조』(酉陽雜俎)에는 감은 일곱 가지 좋은 점을 갖춘 칠덕수(七德樹)라고 했다. 첫째 수명이 길고 둘째 잎이 풍성하여 그늘이 짙으며 셋째 새 둥지가 없고 넷째 벌레가 없으며 다섯째 단풍이 든 잎이 아름답고 여섯째 과실이 훌륭하며 일곱째 낙엽이 두껍고 크다. 한마디로 버릴 게 없는 이로운 나무라는 말이다. 조선 후기 유박이 쓴 『화암수록』의 「화목구등품제」에도 감나무를 6등에 넣고 덧붙이기를 7절(七絶), 즉 일곱 가지 좋은 점이 있다고 했다.

◆홍시와 주세붕의 효행
감나무의 잎은 손바닥만큼 크고 넓어서 글씨도 쓸 수 있다. 중국 당나라 때 시서화(詩書畵)의 3예(藝)에 뛰어나 현종으로부터 '정근삼절'(鄭虔三絶)이라 극찬을 받았던 정건은 젊어서 종이와 붓을 못 살 정도로 가난했다. 커다란 감나무가 있는 자은사(慈恩寺)를 찾아가 감잎 한아름을 가져와 그 잎에 글을 쓰며 공부했다. 벼슬에 오른 후 감나무 잎에 써놓았던 글과 그림으로 책을 엮어 황제에게 바쳤는데 칭찬과 함께 큰 상을 받았다. 여기서 '시엽임서'(柹葉臨書)라는 말이 생겼고 감나무 잎을 시엽지(柹葉紙)라고 일컬었다.
또 감나무를 오절수라고 불렀다. 문무충절효(文武忠節孝)의 다섯 가지를 갖춘 나무라는 뜻이다. 잎이 넓어 글씨 연습하기 좋으므로 문(文)이 있고 나무가 단단하여 화살촉으로 쓰여 무(武)가 있으며 열매의 겉과 속이 같이 붉으므로 충(忠)이 있고 서리 내리는 늦가을까지 열매가 달려있어 절(節)이 있으며 물렁한 홍시는 이가 없는 노인도 먹을 수 있어 효(孝)가 있다는 얘기다.
아버지가 홍시를 좋아하는 연유로 평생 홍시를 먹지 못했다는 조선시대 백운동서원을 세운 주세붕의 행장(行狀) 내용은 홍시와 효의 좋은 사례다.
감나무는 다섯 가지 색(흑-심재 먹감나무, 청-잎, 황-꽃, 적-익은 감, 백-곶감)을 지닌 나무로 통한다.
◆'씨 없는 감' 청도 반시
청도반시(盤柹)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씨 없는 감'으로 유명하다. 생긴 모양이 둥글고 넓적한 청도반시는 수분을 안 해도 결실이 가능한 품종이기 때문에 일부러 수꽃을 제거해 씨를 맺지 않게 만든다. 반시가 청도에 들어오게 된 것은 조선 명종1년(1545년)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 세월마을 출신의 일청제 박호가 평해 군수로 재임하다가 귀향할 때 그곳 감나무의 접수를 가지고 와서 감나무에 접목했다.
청도의 토질과 기후에 잘 맞아떨어져 새로운 품종 '세월반시'가 됐다. 감나무는 청도군을 대표하는 과일나무 가운데 하나다. 군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과수일 뿐만 아니라 가로수로도 활용된다.
감나무는 우리나라, 일본, 중국서만 식용으로 재배하는 과일나무라고 한다. 단감은 원래 일본특유의 품종을 개량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따뜻한 지역에서만 자라기 때문에 경남 진영이나 의령 등이 유명하다.

◆대구 계산성당 '이인성나무'
대구 중구 계산성당 남쪽 쉼터 앞에 감나무 한 그루가 떡하니 서있다. 앞에는 '이인성 나무'라는 안내판이 있다. 대구 출신 '조선의 고갱'이라는 천재 화가 이인성(1912~1950)의 작품 '계산동 성당'(34.5㎝×44㎝·국립현대미술관 소장)에 나오는 앙상한 나목이 바로 이 감나무다. 작품에는 성당 붉은 벽면을 배경으로 기와지붕이 보이면서 중앙에 이파리 하나 없는 채로 서있다. 그의 작품 명성에 걸맞게 감나무도 스토리텔링으로 거듭났다.
찬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김남주 시인의 시 「옛 마을을 지나며」이다. 옛 어른들은 감을 딸 때 높은 가지에 있는 감 몇 개를 '까치밥'으로 뒀다. 풍족하지 못한 시골이지만 날짐승을 위한 '빈자일등'(貧者一燈)의 배려가 아닌가. 또 가을에 양기를 품은 붉은색 열매를 남겨놓아 차가운 음의 기운이 점차 강해지는 시기에 음양의 조화를 이루기 위한 마음이기도 하다.
감나무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린 홍시가 날로 빨개진다. 추워지는 시기에 훈훈한 정이 담긴 홍시를 이웃에 나누면 어떨까.

선임기자 chungham@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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