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핼로윈 참사는 몇 가지 특이점이 있다. 사망자와 부상자를 합한 피해자 중 사망자의 비율이 다른 사고에 비해 이례적으로 높다. 97명이 사망한 1989년의 영국 힐스버러 축구장 압사 사고의 사망자 비율은 11.2%였다. 11명이 사망한 2001년의 일본 아카시시(明石市) 불꽃놀이 압사 사고의 사망자 비율은 5.6%였다. 이태원 사고의 경우 사망자는 156명, 부상자는 197명으로 그 비율이 44.1%나 된다.
한편, 영국의 압사 사고는 펜스가 있는 축구장 통로에서 일어났고, 일본의 압사 사고는 덮개가 있는 육교에서 발생하였으나, 이태원 압사 사고 장소는 골목길이다. 이태원에서는 피해자나 목격자에 의한 휴대폰 신고와 구조 요청이 빗발쳤다. 반면 힐스버러 사고 때는 휴대폰이 일반화되기 이전으로 신고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고, 아카시시 육교 압사 사고의 경우 통화량 폭증으로 휴대폰이 불통이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억울하게 죽었다. 축제를 즐기기 위하여 나왔다가 왜 길에서 사람에 끼어 생을 마감하여야 했는지, 무슨 이유로 구출이 없었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그 점에서 유가족들은 원한이 사무친다.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망자와 그 유가족의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주는 것을 신원(伸冤)이라고 한다. 애도와 사과만으로는 신원이 되지 않는다. 신원에는 진실이 필요하다. 예로부터 억울한 죽음에 대한 신원은 죽음의 원인을 낱낱이 밝히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우리 법원은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경우에 '신원권'(伸冤權)을 인정한 바 있다. 서울고등법원(재판장 권성)은 1993년 박종철 고문치사와 관련된 손해배상청구 사건에서, 뜻밖의 죽음을 당한 경우에 그 진상을 밝혀내고, 그 결과 억울한 일이 있을 때 법절차에 호소해 망자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할 의무에 대응하는 권리를 신원권이라고 보았다.
경찰 조사 중 물고문으로 박종철이 사망하였음에도 경찰이 사실을 은폐하고 사인을 허위로 발표한 행위를 신원권을 침해한 불법행위로 보아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하였다. 국가인권위원회도 2003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 관련 의결서'에서 희생자 유족들의 신원권을 인정하였다.
이태원 참사로 인한 피해자는 사망자에 국한되지 않는다. 참사에서 구조되거나 참사를 목격한 사람들을 포함한 국민 모두가 피해자이다. 국민들은 집단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길거리 축제에서 젊은 생명이 보호받지 못한 나라에 대하여 자괴감과 분노를 느낀다. 공동체에는 이런 2차적 피해가 더 심각하다. 이런 피해를 회복하는 유일한 방안은 신속한 진상 규명과 그에 터 잡은 안전 시스템의 마련이다. 진실의 은폐는 엄청난 대가를 치른다.
진실의 은폐로 엄청난 대가를 치른 사례가 바로 영국 힐스버러 축구장 압사 사고이다. 97명이 사망하고 766명이 부상한 참사였으나, 당초 경찰 조사는 사고 원인을 술 취한 훌리건들의 잘못으로 돌렸다. 진상을 규명하려는 유가족들의 노력으로 참사 20년 후에야 결실을 맺었다. 2009년 테일러 대법원장이 이끄는 독립 패널이 구성됐고 2012년 9월 보고서가 발표됐다. 조사 결과 재난의 주요 원인은 '경찰의 군중 통제 실패'로 밝혀졌다. 경찰은 경기장에 내재된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고, 피해자인 팬들에게 조직적인 책임 전가를 시도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경찰이 164개의 진술을 변조하고, 116개의 자료에서 재난 대응 리더십 부족 등 부정적 의견이 삭제되었음이 뒤늦게 드러났다.
독립 패널의 보고서가 발표되자 영국 총리 카메론은 힐스버러 참사에 대하여 두 번의 부정의(double injustice)가 있었다고 했다.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 부정의와 당초 조사에서 축구 팬들에게 사고 책임을 돌린 진실 은폐와 그로 인한 진실 발견 지연에 대한 부정의를 사과하였다.
공식적인 애도 기간이 끝나자마자 이태원 참사는 재난 정치의 소재가 되고 있다. 역겨운 일이다. 재난은 비극이지만 한 사회와 리더의 민낯을 볼 수 있는 기회이다. 진상 규명을 내걸고 있지만 현명한 국민은 양두구육임을 다 안다. 진상 규명을 빙자한 주장이나 논의는 참사 희생자들을 제물로 하여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는 부정의이다. 재난 위기의 상처를 치유하고, 안전 대한민국의 기초를 다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원한이 신원되어야 한다. 신원을 위해서는 신속한 진상 규명이 최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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