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칼럼] 우리를 진정 분노케 하는 것은?

이상준 사회부장

이상준 사회부장
이상준 사회부장

2003년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 등 초대형 사건·사고 현장에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유족'을 취재하는 것이었다.

무고한 희생, 억울한 죽음 앞에서 '취재'라는 이름으로 유족들의 아프고 힘든 기억을 끄집어내는 일은 어쩌면 '가학'일지도 모른다는 자괴감에 빠져들곤 했다. 때론 유족들의 참담함과 비통함에 동화돼 몇 날 며칠을 헤어나지 못했다.

2022년 10월 29일 발생한 이태원 참사는 전 국민적 트라우마를 남겼다. 156명의 목숨을 앗아간 전대미문의 압사 사고에, 우리 모두가 그날의 악몽과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은 유족의 슬픔과 전 국민적 아픔이 정치 도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9일 "세상 어떤 참사에서 이름도, 얼굴도 없는 곳에 온 국민이 분향을 하고 애도를 하냐"며 "유족이 반대하지 않는 한 이름과 영정을 공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 7일 민주당 한 현역 의원이 읽고 있던 문자 메시지에 '유가족과 접촉하든 모든 수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전체 희생자 명단·사진·프로필을 확보해 당 차원의 발표와 함께 추모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내용이 담겨 논란이 일었다.

다음 날 '부적절한 의견'이라며 선을 그었던 민주당은 유족 동의를 전제로 하루 만에 '공개해야 한다'고 입장을 뒤집었다.

과거 대형 참사에서 희생자들의 '명단·사진·프로필'이 한꺼번에 공개된 적은 없었다. 2003년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 때 사망자 명단이 공개된 이유는 신원 파악 필요성 때문이었다.

취재 현장에서 만난 유족들 태반은 신상 공개를 꺼린다.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세상에 알려지길 원하지 않는다. 정신과 전문의들 역시 유족들이 2차 가해에 시달릴 우려가 있는 만큼 철저히 피해자 입장에서 판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모든 수단 방법을 동원한 전체 희생자 명단·사진·프로필 확보'라니, 글의 맥락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족들에 대한 예우와 공감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사태 수습과 책임자 처벌은 안중에도 없이, 이태원 참사를 정치 도구화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태원 참사의 정치 도구화에 여당도 자유로울 수 없다. 정미경 전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지난 4일 CBS 라디오에 출연해 "세월호 이후에 민주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이 뭐라고 했느냐. 앞으로 안전, 최고로 치겠다고 하지 않았나. 이런 사고가 났다는 건 일단 문재인 정권 책임이 있는 거다"라고 했다.

정 전 최고위원의 발언은 이번 사태에 대한 정부 공직자들의 책임 회피 발언과 오버랩된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참사 다음 날 브리핑에서 "경찰이나 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다"고 말해 공분을 샀다.

정부와 여야 정치권이 직시해야 하는 본질적인 문제는 이번 참사가 행정안전부와 경찰 지휘체계의 붕괴, 공공기관과 공직자들의 탁상행정과 무사안일이 빚어낸 인재였다는 것이다.

사태 수습의 첫 번째 출발점은 지휘 계통에 대한 보직 해임과 자진 사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에 대한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묻는 것이, 그나마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첫 출발점이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에 머리를 맞대도 모자랄 판에, 서로를 향한 정치 공방과 책임 회피에만 급급한 위정자와 공직자들. 이들이야말로 우리를 진정 분노케 하는 원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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