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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김춘수, ‘무의미시’ 그리고 ‘처용단장’

손진은 시인

손진은 시인
손진은 시인

김수영과 함께 해방 후 한국 현대시의 양대산맥으로 불리는 김춘수는 흔히 '무의미의 시인'으로 불린다. 그의 '무의미 시학'의 핵심적인 요소로 기능하는 것은 말의 기능, 즉 언어가 실체를 지시할 수 없다는 인식이다. 하늘이 높다는 것은 거짓이다. 하늘은 단지 허허로운 공간이요 무일 따름이다. 바다가 푸르다는 말도 거짓이다. 육지에 가까운 곳은 연둣빛이고 멀리 나갈수록 쪽빛이 됐다가 수평선 가까이 이르면 거무스럼한 자줏빛을 내는 광선의 조화일 뿐이다. 그러나 하늘은 사실로는 없지만 있다. 바다 또한 넓디넓은 수평선으로 우리에게 존재한다. 있다는 것은 이렇게 환상적이다.

마찬가지로 식물학자가 들여다보는 꽃은 시인 말라르메가 말한 것처럼 '꽃!'이라고 우리가 부르면 우리 눈앞에 피어나는 그런 꽃이 아니다. 꽃은 하나의 말이다. 기표가 만들어내는 환상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꽃'의 창작배경을 말하는 글에서, 그는 "책상 한쪽에 놓인 유리컵에 하얀 꽃 한 송이"가 이 순간 이후면 사라지게 될, 지워지기 전의 선명한 빛깔로 다가왔다고 말한다.

'꽃'에 대한 인식은 '말'에 대한 인식으로 수렴되고, 무의미시로 발전한다. 무의미시에는 이미저리(Imagery)가 논리의 연결이 아니라 돌연하게 결합·병치됨으로써 신비와 리얼리티가 살아난다. 그게 유희다. 유희는 대상이 없이 부리는 인간의 유일한 행위이다. 그의 개성이 포착한 자연의 인상은 화가 잭슨 플록의 '액션 페인팅'과 같은 얽힌 궤적들이 보여주는 생생한 단면으로서의 현재, 즉 '영원'이 태어나게 한다. '처용단장' 1·2부의 시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시들은 한 행이나 두 세 개 행이 어울려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가려는 기세를 보이면 그것을 사정없이 처단하고 다른 활로를 개척한다. 미완성의 이미지들이 서로 이미지가 되려고 하는 피비린내가 나는 싸움을 벌인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의미시'들은 어떻게 탄생했는가에 대한 물음에 도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역사'에 대한 대응방식에 연유한다. 김춘수는 '꽃과 여우'라는 자전소설에서 역사의 폭력을 "한 개의 죽도(竹刀)와 한 가닥의 동아줄과 같은 물건으로 나를 원숭이 다루듯" 한다고 말한다. 역사는 절대적으로 진짜 얼굴처럼 보이지만 실은 상대적이며 이데올로기라는 탈을 쓰고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라는 미명 하에 편파적으로 거짓말하고 있다. 이 폭력을 심리적으로 극복하는 길에서 만난 인물이 '처용'이다. 시집 '처용단장'에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존재들은 나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역신'과 같은 존재이다.

김춘수에게 유년은 자신의 내부를 탐색하며 발견한 도피처이며 순결의 시간을 누릴 수 있는 원초적인 시공간으로 작용한다. 초역사적이고 신비적인 존재인 처용을, 유년·바다와 함께 육화시키고 있다는 것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삶의 의미를 시에서 배제한다는 뜻이며, 바다·순결·탱자나무·죽도화·하얀 새·나비·게·물고기 등의 순결과 평화를 보여주는 오브제들은 김춘수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본능적 욕망의 단편들이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얼핏 아름답게 보이는 그 이미지들이 세계와의 불화에서 탄생한 무의미시라는 것은 역설적이다. 김춘수 무의미시 미학의 근원과 새로움을 오늘의 시점에서 다시 주목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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