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영혼 없는 12일

이화정 소설가

이화정 소설가
이화정 소설가

"한 달에 한 번 일요일을 준다고 생각하고 내게 12일의 휴일을 줘." 밥을 먹다 불쑥 이렇게 말했다. '줘'라는 요구로 끝냈지만 '제발'이라는 부사가 생략된 애원에 가까웠다. 오래전 일이다. 산후우울증이나 번아웃 증후군이란 용어가 일반적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호강에 겨운 투정으로 치부하며 꾹꾹 눌러온 감정들이 명치에 걸려, 뱉지도 삼키지도 못한 채 질려가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도무지 나 같지 않았다. 아니, 나 같은 것이 무엇인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멀리, 최대한 멀리 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그러나 막상 비행기에 오르자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내 일을 고스란히 떠맡을 사람에게 미안했고, 이제 막 이유식을 시작한 아이가 느낄 나의 부재에 괴로웠다. 나라는 사람은 책임감도 자격도 없는 것 같았고 그것이 주는 자괴감에 슬펐다. 그 와중에도 비행기는 속절없이 날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비행기에 내려 게이트를 향해 발을 내딛는 순간,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사라졌다. 지금까지 나를 짓누르던 온갖 무거운 것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신성한 효과음과 함께 내게로 빛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공기 중을 떠도는 이국의 냄새에 몸을 맡기고 미지의 땅을 향해 홀린 듯 걸음을 옮겼다.

해마다 다른 장소에서 같은 경험을 했다. 어김없었다. 떠날 때의 힘들고 복잡한 심경들이 도착과 동시에 자취를 감추는 것은 물론이고, '좋다' 이상의 어떤 기운이 분명하게 일어났다. 그것은 몸에서 무엇이 떨어져 나가거나 벗겨지는 느낌으로, 굳이 표현하자면 내가 거피나 탈피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현상에 대해 늘 의문이 들었는데, 다와다 요코의 책을 읽다 답을 발견했다. "영혼은 비행기처럼 빨리 날 수 없다는 것을 인디언에 관해 쓴 어떤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고 여행할 때 영혼을 잃어버리고 영혼이 없는 채로 목적지에 도착한다. 심지어는 시베리아 열차도 영혼이 나는 것보다 빨리 간다."

그러니까 나는, 여행지에 도착했을 때 영혼이 없었다. 비행기처럼 빨리 날 수 없었던 내 영혼은 나를 놓치고 제 속도로 따라오는 중이었다. 나는 영혼이 없는 채로 라다크와 다람살라를, 그라나다와 루앙프라방의 골목을 쏘다녔다. 소똥이 잔뜩 묻은 쪼리를 신고 강가를 어슬렁거리고, 달 호수의 하우스 보트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잤다. 여행에서 돌아와 얼마간 멍했던 것도 시차 때문이 아니라, 나를 찾아 여행지로 갔던 영혼이 한국의 내게로 되돌아오는 시간이었다.

영혼이 없는 나는 비워낸 영혼만큼 가벼웠고, 영혼이 없으니 생각이란 것도 없었다. 그래서 오직, 즐거웠다.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12일이란 기간을 정확하게 지킨다. 일 년 중 영혼 없는 12일을 보낸 뒤, 다시 영혼을 장착하고 나머지 날들을 씩씩하게 살아낸다. 그보다 더 길면 영혼이 내 육체를 따라잡을 것이고, 그러면 그 어떤 장소도 도로 생활이 될 것이다. 물론 이곳저곳을 계속 옮겨 다니며 영혼이 못 쫓아오게 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나는 돌아오지 않으려 떠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니까. 글자 그대로 영혼을 갈아 넣은 내 삶이, 바로 여기에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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