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노인영의 풍수이야기] <5>안동의 진산 영남산과 임청각

정승 3명·독립운동가 11명 산실…일본도 두려워 철길로 관통
500년 역사 지닌 고성 이씨 대종택…흰 코끼리 코 내밀어 물 마시는 형상
안동의 진산 영남산 기슭 자리 잡아…해와 달 집으로 들이는 用자형 배치

임청각을 풍수 물형으로 조명해 보면 흰 코끼리가 물을 마시기 위해 강가에 코를 내미려는 형상이다.임청각 뒷산이 안동의 진산인 영남산(映南山)이다.
임청각을 풍수 물형으로 조명해 보면 흰 코끼리가 물을 마시기 위해 강가에 코를 내미려는 형상이다.임청각 뒷산이 안동의 진산인 영남산(映南山)이다.

경북 북부에 위치한 안동(安東)의 지명은 930년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고창(古昌, 지금의 안동) 지방에서 전투를 벌일 때 이 지방 고을 성주인 김선평(金宣平)과 고을인 권행(權幸), 장정필(張貞弼) 세 사람이 고려가 승리하도록 도왔고, 이 전투에서 승리한 고려는 936년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왕건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세 사람(三太師)을 공신으로 추대하고 태사의 벼슬을 하사했으며 이 지역에 '동쪽을 평안하게 하다'라는 뜻의 '안동'이라는 새 이름을 내렸다.

안동은 '동방의 주자'라고 불린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을 비롯하여 그의 제자인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 겸암(謙唵) 류운룡(柳雲龍, 1539∼1601), 서애(西厓) 류성룡(柳城龍, 1542∼1607),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 등 퇴계학파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독립운동 발상지(1894년 안동 의병을 독립운동의 최초 역사로 기록됨)인 안동은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인 석주 이상룡 선생, 국민회의 의장인 일송 김동삼 선생 등 출중한 독립운동가를 포함하여 전국에서 가장 많은 363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하였다.

임청각 군자정
임청각 군자정

◆음양(陰陽)의 충화 융합으로 길상

안동의 진산은 영남산(映南山)이다. 안동읍지 『영가지(永嘉誌)』에는 영남산을 안동의 주산(主山)이라고 설명했다. 영가는 안동의 옛 지명이다.

영남산의 한 가닥인 상산(象山) 기슭에 자리 잡은 배산임수의 명당인 임청각(臨淸閣, 보물 제182호)은 형조 좌랑이었던 이명(李洺)이 1519년에 건립한 건물로, 500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고성이씨의 대종택이다. 임청각은 중국 동진의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맑은 시내를 만나 시를 읊는다.(임청유이부시(臨淸流而賦詩))'는 구절에서 '임청' 두 자를 취했다.

임청각의 평면도를 동쪽에서 보면 용자형(用字形)이다.
임청각의 평면도를 동쪽에서 보면 용자형(用字形)이다.

이 집의 평면도를 동쪽에서 보면 용자형(用字形)이다. 용자의 의미는 일형(日形)과 월형(月形)을 합한 것으로 하늘의 일월(日月)을 집으로 불러들여 천지의 정기(精氣)를 화합시켜 생기를 받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풍수에서는 음양(陰陽)의 충화 융합(冲和融合)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일월을 합친 모양으로 길상(吉祥)을 구한 것이다.

임청각의 안채에는 태실이 있다. 이곳은 '세 사람의 정승이 태어난다.'는 설을 가진 방이다. 태실 아래 우물이 있어 일명 '우물방'이라 한다. 이 우물은 풍수에서 말하는 진응수(眞應水)가 솟아나는 자리로, 이 진응수가 솟아오름은 그 위에 명당 혈이 결지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이 방을 영실(靈室)이라고 하며 신성시했다.

강원도 삼척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5대조 묘소인 준경 묘 아래에도 진응수가 있고 물맛이 좋기로 소문이 나있다. 약봉의 태실이 있는 일직 소호헌(蘇湖軒, 보물 제475호) 아래에도 진응수가 나오는 우물이 있다.

임청각의 안채에는 태실.태실 아래 우물이 있어 일명
임청각의 안채에는 태실.태실 아래 우물이 있어 일명 '우물방'이라 한다.

◆세 정승과 11명의 독립운동가 배출

이 집에서 3인의 정승과 3대에 걸쳐 11명의 독립운동가가 태어났다. 3인의 인물이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이었던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 5도 관찰사와 3조 판서를 역임한 약봉(藥峰) 서성(徐渻, 1558∼1631), 고종 때 좌의정을 역임한 낙동 대감 류후조(柳厚祚, 1799∼1876)가 외가인 임청각 우물방에서 태어났다. 약봉 출생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으나 친정이 가까이 있으니 친정에서 몸을 풀었을 것이다.

이명(李洺)의 다섯째 아들 이고(李股)는 고명딸 하나를 기르고 있었다. 귀한 고명딸은 안타깝게도 5세 때 악질에 걸려 그만 청맹과니(겉으로 보기에는 눈이 멀쩡하나 앞을 보지 못함)가 되었다. 이런 허물을 알면서도 의연하게 아내로 맞이한 심성 깊은 청년이 바로 함재(涵齋) 서해(徐嶰, 1537∼1559)이다. 젊은 유생 서해는 23세를 일기로 요절하고 만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때 두 살짜리 아들 하나를 남겨두었다. 눈먼 이씨는 시댁 친척들이 있는 서울로 올라가 이 아들을 업고 약현(藥縣) 고개에서 억척스럽게 장사를 하면서 정성 어린 뒷바라지를 하여 마침내 아들은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가 판서 반열에 오른다. 그가 바로 약봉 서성이다. 오늘날 전통 한식인 약과, 약식, 약주들의 명칭이 약봉의 어머니가 약현에서 만들어낸 음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

대구 서씨(大丘 徐氏)는 약봉 이후 6대에 걸쳐 3대 정승, 3대 대제학, 문과 급제자 122명, 정승 9명, 판서 30명 등 수많은 인물을 배출한 명문가가 된다. 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서씨 집안이 갑자기 번성하게 된 것은 풍수에 관심이 많았던 이씨 부인이 당대 유명한 지관의 자문을 받아 시어른과 남편을 대명당 자리로 이장을 한 결과가 아닐까. 풍수가들은 경기도 포천에 있는 약봉 조부와 부모, 그리고 약봉 부부 묘소를 조선 8대 명당 중 하나로 평가한다.

임청각에서 바라본 조안산과 용상.
임청각에서 바라본 조안산과 용상.

◆흰 코끼리가 강가에 코를 내미려는 형상

임청각을 풍수 물형으로 조명해 보면 흰 코끼리가 물을 마시기 위해 강가에 코를 내미려는 형상이다. 임청각은 바로 이 코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강 건너에는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는 용상(龍上)이 있고, 조안산(朝案山)에는 성인 3명이 날 수 있음을 뜻하는 삼공사(三公砂)가 있는 것을 보면 이 자리가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다. 건물의 좌향은 해좌 사향(亥坐 巳向)이다.

일제 강점에 분노한 석주가 가산을 정리한 후 조상의 위패를 땅에 묻고 일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게 된 이 담대한 결단은 영남산 코끼리의 기질 때문으로 보인다. 코끼리는 육지에 사는 동물 가운데에서 가장 큰 짐승이며 영리하고 그 힘은 대단하다. 이러한 형상에는 코나 상아 부위에 혈(穴)이 맺힌다.

일제는 풍수지리가 미신이라고 호도하면서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정기를 끊으려고 갖가지 만행을 저질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석주가 임청각을 매각하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매진하자 1942년 중앙선 철도를 개설하면서 99칸짜리 임청각 마당 가운데로 철길을 내버렸다. 좌우 부속건물과 마당, 대문 등 거의 절반을 훼손하여 버렸다.

여기뿐만 아니라 경주 양동마을 앞과 학봉 김성일 선생 묘소의 래용(來龍)이 끊어지도록 철로 설계를 하였다가 후손들과 영남 유림들이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포기하고 철길을 돌린 바 있다. 미신이라면 이들이 이러한 행위를 했겠는가? 그것은 걸출한 인재가 태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치밀한 풍수 전략인 것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아직까지도 풍수가 미신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2020년 안동역사 이전 이후 임청각 앞을 가로막던 철로와 방음벽은 전부 철거되었고 현재 복원 공사가 한참 진행 중에 있다. 현장 소장에게 양해를 구하여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 입혈맥과 태실, 우물, 군자정, 삼공사 사격 등을 볼 수 있었다. 2025년에 복원이 완료되면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종택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양반으로서의 기득권을 버리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는 가진 자의 리더십,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바로 임청각이다.

노인영 문강풍수지리연구소 원장
노인영 문강풍수지리연구소 원장

글·사진 노인영 풍수가·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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