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근대 여성 문학가인 백신애 리서치 전시를 준비하던 나는 몇 달 동안 근대의 시간 속으로 빠져들었다.
내가 사는 경산 자인면의 자인초등학교에서 백신애가 교사로 근무한 적이 있다는 기록을 읽고 초등학교를 찾아갔고, 그녀가 근무했던 당시의 학교 모습과 학교 주변의 사진을 구하려고 이곳저곳에 문의했다. 그 과정에서 경산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볼 수 있었고 백신애의 글을 따라서 1920년대 당시의 풍경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기도 했다.
내가 상상하며 만들어 본 근대의 모습은 황폐한 길과 낮은 지붕의 초라한 풍경이었다. 낭만보다 당시의 답답한 현실이 가슴을 죄어왔다. 근대라는 시간은 내게 비어있는 집처럼 느껴졌다. 근대라는 시간과 공간은 나와 연관이 있는, 누군가 살았던 흔적이지만 그것이 현재의 무엇과 연결돼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묘한 것이었다.
지금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작가인 양혜규가 큐레이터 김현진과의 협업으로 2006년 8월 인천의 사동 30번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이곳은 작가의 외조모가 살았던 곳으로 오랫동안 빈 집으로 방치됐던 곳이다.
이 집은 좁은 막다른 골목에 겨우 세워져 있었다. 지붕이 허물어져 벽지가 내려앉아 있었고 집의 군데군데 구멍이 난 이 집은 오랜 시간 동안 사용되지 않은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양혜규의 전시는 손으로 끄적거린 약도로 관람객을 초라하며 막다른 골목으로 이끌었다.
사동 30번지를 방문한 사람들은 그곳에서 '고향'을 떠올리거나 개발 의지만으로 소외된 공간에 대한 야릇한 향수를 느꼈을 것이다. 오랫동안 아무도 살지 않았던 일본식 목조 가옥의 빈 집은 근대라는 시간과 현재의 사회적 시간과 역사를 유지한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양혜규 작가는 이런 식으로 집이 쌓아온 경험의 깊이를 작품에 담았다. '사동 30번지' 전시 이후 빈 집을 이용한 전시는 미술계의 유행 중 하나가 됐다.
양혜규의 사동 30번지 전시가 오래된 빈집을 이용한 첫 전시는 아니었다. 1995년 서울 종로의 율곡로에 있는 아트선재센터의 건물도 누군가 오랫동안 살았던 집이 있던 곳이었다. 미술관을 짓기 위해 철거하기 전, 정원을 가진 한옥과 양옥이 함께 있었던 집에서 '싹'이라는 전시가 열렸다. '싹'의 의미는 세워질 미술관의 시작과 함께 옛 공간과 시간에 작별 인사를 건네는 것이었다. 이 집의 양식 역시 일본식 구조가 섞인 개량식 한옥과 서양식 건물이 증축된 형태였다. '싹'에 참여한 작가들은 이곳저곳의 공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작업을 전개하기도 하고, 사용되었을 물건들로 작품을 만들었다.
근대는 '레트로'라는 이름으로 현재 우리 사회의 중요한 문화적 현상이자 소비 현상이다. 레트로는 낡아서 버려야만 했었던 우리 역사의 일부분을 향수한다는 명분을 가진다. 또한 이제는 우리의 뿌리를 돌아볼 수 있다는 여유이기도 하다.
지금은 오래된 빈집을 이용한 카페나 문화공간이 인기가 많다. 근대를 향수하는 이런 현상은 나쁜 것이 아니다. 전시의 경우 화이트큐브를 벗어나서 색다른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근대를 역사적인 성찰 없이 무작정 향수의 의미로만 소비한다면 알맹이는 빠졌고 표면만 남게 된다. 일제 식민지정책의 교묘함과 일본제국의 문화정책으로 스며든 근대의 유산과 우리 민족 삶의 흔적을 잘 살펴서 구별해야 한다.
근대는 낡은 벽면과 벗겨진 페인트, 깨진 타일 파편에만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빈 집으로 방치됐던 근대를 재조명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도 "근대를 어떻게 소비할 것인가?" 이 질문은 여전히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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