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색으로 그린 이병직의 대나무그림 '주죽'이다. 묵죽 아닌 주죽이라니? 뜬금없는 이 대나무그림은 중국의 동파 소식에서 유래한다. 동파육 레시피를 개발한 바로 그 소동파다. 소식이 붉은 주필을 들고 시험장에서 채점을 하다 갑자기 그림을 그리고 싶은 화흥(畵興)이 일어나 그 붓 그대로 대나무를 그렸다.
이 그림을 본 누군가가 "세상에 붉은 대나무가 어디 있단 말이요?"라고 물었다. 소식은 "세상에 검은 대나무가 어디 있단 말이요?"라며 그대로 되받았다.
먹으로 그린 검은 대나무 묵죽이나 주필로 그린 붉은 대나무 주죽이나 세상에 없기는 마찬가지라니 틀린 말은 아니다. 덧붙여 "잘 감식하는 사람은 마땅히 겉모습의 밖에서 감상한다"며 춘추시대 구방고가 천하의 말 중에서 명마를 찾아냈지만 그 말이 암컷인지 수컷인지, 검은색인지 누런색인지는 잊어버렸다고 했다. 그림이란 재현이 아니라 그린 사람의 뜻에 그 본질이 있고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문인화론은 소식의 이런 관점에 출발한다.
소식의 즉흥적인 엉뚱함과 기발한 대답이 전해지며 이 일화를 바탕으로 주죽이 그려진다. 붉은색을 상서롭게 여기고, 붉은 물감인 주사(朱砂)가 단약의 재료이자 약재여서 주죽은 회갑, 고희, 산수, 미수 등에 선물하는 그림이기도하다. 죽(竹)과 축(祝)의 중국어 발음이 같아 주죽은 경사를 축하하는 그림선물인 축화(祝畵)로 더욱 잘 어울린다. 같은 뜻으로 붉은 소나무, 붉은 매화, 붉은 난초를 그려 길상을 나타낸다.
주죽은 중국에서 명나라 때 다색목판화로 나온 화보집인 '십죽재서화보' 중 '죽보(竹譜)'에 '주피(朱帔)'로 수록돼 죽화의 한 유형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병직은 대나무의 군자성을 강조한 '범천하지물(凡天下之物) 유차위불위(唯此爲不僞) 양선(養善) 작(作)'으로 제화를 써 넣어 '천하의 사물 중에 오직 이것이 거짓되지 않다'라고 했다. 가는 줄기에서 솟아난 어린 댓잎이 위를 향하는 앙엽(仰葉)법의 젊은 대나무다. 자(字)로 서명했고 작은 작품에 맞춤한 4방의 인장을 찍었다. 죽간 사이에 있는 '한묵방연(翰墨芳緣)', 글머리의 '여시여시(如是如是)', 마지막의 '이씨(李氏)', '병직(秉直)' 등은 작품을 대하는 그의 세심한 태도와 전각에 대한 안목을 알려준다. 그림과 글씨의 취미를 공유하는 사이인 손위 분에게 생신 축화로 선물했을 것이다.
세상에 없다고 한 먹색 대나무인 검은 오죽(烏竹)이 있고, 홍색 죽간의 붉은 대나무 홍한죽(紅寒竹)도 있으며, 아롱무늬가 있는 반죽(斑竹), 거북 등껍질을 닮은 구갑죽(龜甲竹)까지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의 상상력만큼 자연 또한 무궁무진하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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