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광야로 나가다

백창하 연출가

백창하 연출가
백창하 연출가

필자에게는 존경하는 선배와, 함께 자라온 동료들이 있다.

처음 예술을 시작했을 때 오디션장에서 마주친 그 선배와의 인연을 시작으로, 그분의 행보를 지켜보고 몇 발자국 뒤에서 따라 걸으며 어깨너머로 배우고 또 많은 일들을 함께하며 성장했다.

선배는 예술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배울 점이 넘쳤다. 놀라운 통찰력과 칼 같은 프로덕션 운영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냉철한 이성적인 모습과 결정력 뒤엔 따스하고 온화한 마음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나를 포함한 여러 동료들이 모였고, 그 선배의 그늘 아래 따스한 온실이 생겼다.

좋았다. 좋은 사람 곁엔 좋은 사람이 모이듯이 예술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결이 맞는 동료들과 연대는 느슨하면서도 견고했고, 함께 하는 작업은 늘 설레는 성장의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선배가 우리를 감싸안기만 하며 키워온 것은 아니다. 늘 이 느슨한 연대 속에서 계속 남으려면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만약 도태된다면 친하게 지낼 순 있지만 일을 같이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해왔으니 말이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기회를 주거나 무언가를 알려주기보단, 스스로가 할 수 있는 능력치보다 살짝 어려운 난이도의 일을 맡기고는 스스로 깨우치고 성장하길 기대했다. 그렇게 전전긍긍하고 있으면 한 번씩 스윽 나타나 힌트를 주고는 또 사라지고 하는 분이었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참 도인 같은 양반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따듯한 온실 속 생활은 갑자기 끝이 났다. 최근 잇달아 연출한 두 작품, 방천 골목 오페라 축제의 '사랑의 묘약'과 달서문화재단의 축제 폐막작의 음악극 '청춘, 그 찬란한 날들'을 마치고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이제 온실에서 나가라는 말이었다. 그 분 성격에 언젠가는 날 밀어내시겠다고 생각은 했었다. 자신의 그늘에 있는 것이 안락하고 안전하긴 하지만, 또 그만큼 예술가에게 위험한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따뜻한 온실을 벗어나 냉혹한 광야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으라는 뜻이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인정해주시는 듯해 기쁘기도 하면서 걱정도 되고, 복잡한 마음이 느껴졌다.

그래, 이젠 온실은 없다. 광야로 나아가야 한다. 두렵기도 하고 걱정도 된다. 하지만 가야 한다.

이제 올해 바쁘고 중요한 일정들은 거의 정리가 된 지금, 이제는 어디로 어떠한 길을 갈지 깊게 고민을 해 볼 예정이다.

그동안은 온실 속에서, 그분의 지대한 영향력 아래에서 내실을 잘 다졌으니, 앞으론 여기저기를 떠돌기도 하고, 찾아다니며 나만의 색과 향을 좀 더 진하게 하는 날들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따뜻한 온실이 그리울 때도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알에서 깨어난 작은 새도 언젠가 둥지를 떠나지 않는가. 나도 어설픈 날갯짓을 시작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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