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임언미의 찬란한 예술의 기억] 그때 그 사진은 누가 찍었을까

김상규 제3회 신무용발표회 팸플릿
김상규 제3회 신무용발표회 팸플릿

근대기나 6.25 전쟁 전후에 제작된 예술자료의 경우, 제작 시기를 정확히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다. 신문이나 잡지에 기록이 남아 있는 경우에는 확인이 쉽지만 그 외에는 해당 예술가의 활동 이력 등으로 유추해야 한다. 그렇다 보니 행사의 일시, 장소, 주최 주관처까지 명기된 팸플릿은 아주 확실하고도 소중한 자료가 된다. 간혹 사진까지 수록된 팸플릿을 발견하면 예술가의 얼굴이나 의상 등 공연을 준비하던 분위기까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단기 4286년(1953년) 6월 4일~6일, 중앙국립극장(현 한일극장 자리)에서 문총경북연합회 주최로 열린 '제3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 공연 팸플릿은 아주 특별한 자료다. 4면으로 제작된 이 팸플릿에는 표지 전면에서부터 김상규 무용가의 무용 사진이 크게 들어가 있고 그 외 3장의 사진이 더 실려 있다. 공연 작품명과 순서, 출연자, 스태프들, 김상규무용연구소 고문과 이사, 후원회장의 이름도 있다. 그뿐 아니라, 당시 문총경북연합회 회장이었던 서동진의 인사말과 마해송, 한솔 이효상, 김동사 등 유명 문인들의 축사까지 찾아볼 수 있다.

당대 대부분의 공연·전시 팸플릿에는 행사에 대한 아주 간략한 정보만 수록되어 있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팸플릿에 실린 유명 문인들의 축하 글을 보며 6·25 전쟁기 피난 예술가들의 교류까지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역동적인 무용의 동작을 표현한 4장의 사진으로는 공연의 주제까지도 짐작할 수 있다.

대구시 문화예술아카이브 수장고에는 팸플릿 사진의 원본도 보관되어 있다. 이 자료가 입수된 지는 시일이 좀 흘렀지만, 사진들이 종이 앨범에 단단하게 붙어있어 그대로 보관하던 터였다. 오래된 사진임에도 비교적 크게 인화됐고 구도가 특별해 보였지만, 일제강점기 사진들이 일본인에 의해 촬영된 것들이 많았기에 이 사진들에 대해서도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았다.

김상규 제3회 신무용발표회 팸플릿
김상규 제3회 신무용발표회 팸플릿

그러다 지난달 사진들을 새롭게 분류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사진들을 앨범에서 떼어냈고 뒷면을 확인하게 됐다. 몇몇 사진 뒷면에 찍힌 도장이 눈에 띄었다. '대구시 동문동 19번지 최계복'. 대구 출신 한국 1세대 사진작가이자 대구 사단의 개척자, 바로 그 최계복이었다. 바로 사진 전문가들을 통해 진품임을 확인받았다.

그 뒤 팸플릿을 자세히 살펴보니 김상규 무용연구소 고문 명단에 최계복이 있었다. 1953년이면 전쟁 중이라 많은 피란예술가들이 대구에 머물던 때다. 김상규가 구상 시인, 조지훈 시인 등과 친분을 쌓았고 문총구국대 활동을 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최계복도 종군사진가로 활동했으니 서로 친분을 쌓았을 것이다. 당시 30대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남성 무용가의 공연 팸플릿을 위해 '남다른' 사진을 찍어준 사람이 바로 최계복이었던 것이다.

최계복은 1930~40년대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한국근대사진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1909년 대구에서 태어나 17세에 일본 교토로 건너가 필름 현상과 인화 작업 등을 배우고 돌아와 1933년 대구 중구에 '최계복 사진기점'을 열었다. 1947년 경북사진문화연맹 회장을 맡았고, 조선산악회 국토구명사업으로 울릉도와 독도 학술조사에 사진보도원으로 참가하여 소중한 독도사진을 남겼다. 1952년에는 한국사진예술학원을 개원했다. 이곳은 6·25전쟁으로 피난 온 사진인들과 국방부 정훈국의 사무실 겸 숙소로도 활용됐다. 또 1954년 대구사우회, 1956년 경북사진작가연맹을 발족해서 고문을 맡았다. 수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첫 촬영작 <영선못의 봄>이 제일 유명하다.

그는 다큐멘터리 사진뿐만 아니라 신문사진, 리얼리즘 사진, 광고 사진 등 다양한 작품을 통해 한국 사진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피사체를 단순한 대상으로 보기보다 그 안에서 시각적으로 아름답고 예술적인 것을 찾아내려 했고, 이런 노력으로 사진을 단순한 기록물이 아닌 예술작품의 반열에 올려놓았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1960년대 미국으로 이민 간 후 2002년에 작고했다.

최계복이 남긴 사진 80여 점과 필름 169점이 여러 과정을 거쳐 지난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됐다. 그의 고향 대구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는데, 김상규의 자료를 통해 대구가 낳은 사진가 최계복의 소중한 사진 작품들을 얻게 됐다. 김상규의 유족이 작고한 후, 유실될 위기에 있던 자료를 한꺼번에 구입해 대구시에 기증해준 사람이 출향 기업인 이인석 대표이다. 그는 지역 예술인 자료의 가치를 알아봤고, 그것들이 공공의 것이 되어야 빛을 발할 수 있다고 믿은 사람이다. 대구시 문화예술아카이브의 귀한 초석이 되어준 동시에 꽃을 피워준 이인석 대표에게 감사드린다.

임언미
임언미

임언미 대구시 문화예술아카이브팀장, 대구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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