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카 솔닛의 말처럼 장소가, 장소가 거느리고 있는 생물이 사람보다 더 믿을 만하고 사람보다 더 오래 관계가 유지되곤 한다. 내게 있어 그 장소엔 항상 나무가 있다.
그 중 하나는 고도(古都)의 고분군 앞 찻집을 드나들다 만난 메타세콰이아 다섯 그루다. 중간에 있는 세 그루는, 발라낸 생선 가시 같은 가지가 되도록 잎과 살을 덜어 양편 나무에게 흘려보냈다. 수령 50년이 넘었다고 하니 자란 나무들 사이 충분한 간격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 마음을 아는지 양편 나무들은 서로 다른 쪽 잎사귀들만 펼쳐, 조금 떨어져서 보면 다섯 그루가 한 그루 나무의 모습으로 바람에 흔들린다. 서로 몸피를 조금씩 줄여 한 그루의 호흡으로 뿜어내는 연초록의 불길! 가지 사이 새집도 품었고, 슬기로운 그늘도 드리우면서도 조금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저런 헌신을 나는 인간의 세상에서 별로 본 적이 없다. '덜어낸다'는 말의 의미를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나의 이십년 지기 친구, 가끔 그 아래 장의자에 앉아 책을 읽기도, 그들이 드리우는 그늘을 덮고 사그락거리는 잎사귀들의 말을 엿듣다가 낮잠을 자기도 한다.
내가 사는 아파트 109동 측면의 30m는 족히 될 메타세콰이아에 대한 사랑도 고분군의 그 나무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염병의 창궐로 밖을 잘 나가지 못하던 몇 계절의 아침 나절을, 나는 공터에서 '공중걷기'라는 운동기구를 타며 이 나무와 친하게 됐다.
가지들이 연푸른 잎새로 물들어갈 때쯤 이등변 삼각형의 뾰족하고 아득한 꼭대기에서 수컷 직박구리가 몇 분간이나 아래쪽으로 지저귀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다 순식간에 담장 이팝나무에 내려꽂히는 것을 보았다. 구애와 받아들임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서로의 부리를 더듬는 그들은 내 마음을 설레게했다.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나는 그들의 윤기 잘잘 흐르는 연애를 보는 낙으로 아침 운동에 나섰다.
'숲과 들판과 곡식이 자라는 밤을 나는 믿는다'는 소로우의 말이 실감되게, 아침이면 그들은 자태를 달리하고 있었다. 산책길 몇몇 나무들이 나의 마음 속으로 걸어들어오거나 나를 그들의 세상 속으로 끌어들였다. 스무 살쯤 되는 벚나무와 감나무, 쉰 살이 넘어 보이는 이 메타세콰이아들이 그랬다.
끔찍한 일이 생긴 건 올 봄. 아파트 관리소에서 메타세콰이아와 감나무들의 허리를 통째로 잘라놓았다. 새들의 포근한 보금자리를, 단맛이 좋기로 소문난 감나무를 왜? 조경도 일조권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창고 부근의 두어 그루 감나무도 이유를 모르고 허리가 잘렸다. 오며 가며 주민들이 달근한 감 수십 개쯤 따먹었다는 게 죄일까? 베어진 둥치에서 진액이 흘러나오고 몇 달간을 환멸을 참아내는 그들의 속울음을 들어야 했다.
며칠 전엔 낙엽을 청소하는 인부들 송풍기로 가지에 붙은 단풍을 막 밀어내는 걸 보았다. 억지로 잎새들을 가지에서 떼어내려는 그들은 도대체 예의라는 걸 아는 걸까? 나무들은, 또 지나가는 새들은 그들을 어떻게 볼까? 같은 지상의 거주민들이 그런 것쯤은 아는 세상은 언제 오는 걸까?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이라는 하덕규의 노래가 떠오르는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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