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는 앞으로 추워질 것이오, 눈보라 치고 회오리바람 부는 가로에서 이렇게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될 그네들의 앞길은 막막하며 이들을 구제할 자는 또 누구일지? 단군의 피가 같이 흐르는 우리 한민족끼리 이처럼 버림을 받는 서러운 그네들의 생로는 참담하기보다 사활의 기로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에 대해 당국은 대책을 여하히 강구하고 있는지?~'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12월 3일 자)
눈보라 치고 회오리바람 부는 겨울이 다가오면 앞길이 막막했다. 대구부민들은 엄동설한을 넘기기 위해 월동준비를 서둘렀다. 먹을거리를 장만하고 따뜻한 겨울을 보내기 위한 준비였다. 먹거리 준비는 단연 김장이었다. 배추나 무 공급에 따라 비용이 들쑥날쑥해 도시민들에게는 또 하나의 걱정거리였다. 김치에 들어가는 소금을 구하는 일도 수월하지 않았다. 한동안 소금은 전매국으로부터 배급받았다.
추위에 떨지 않으려면 먹거리 못지않게 숯이나 장작 등 땔감이 필요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땔감은 마련하기가 만만찮았다. 민둥산이 많아 나무 땔감을 구하기가 어려워진데다 연료 수요가 늘었기 때문이었다. 대구에서는 칠성시장 등에 장작을 팔려는 지게꾼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연료 부족이 심해지자 부엌의 아궁이를 개조해 효율을 높이려는 시도도 있었다. 석탄의 경우는 쌀값과 맞먹을 정도로 값이 치솟기도 했다. 그만큼 월동 연료로 인기가 있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월동준비에 나서는 것은 아니었다.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그나마 형편이 나았다. 자신의 몸 하나 누일 방 없는 노숙자들은 월동준비조차 사치였다. 이들은 밤이 되면 대구 역전이나 대구공회당, 서문시장 등으로 몰려와 한뎃잠을 잤다. 한뎃잠을 자는 사람 중에는 어린이들도 있었다. 먹고살기가 힘겹다 보니 부모나 자식이 뿔뿔이 흩어져 이산가족이 된 것이었다.
해방 후 노숙자들이 눈에 띄게 불어난 것은 이재민들이 늘어난 영향이 컸다. 일본이나 만주 등에서 돌아온 전재민들이었다. 1946년 하반기까지 190만 명이 넘는 전재민이 고국 땅을 밟았다. 이 가운데 37만 명 정도가 집이 없어 사실상의 노숙 생활을 하는 것으로 추정됐다. 대구부 내에도 2만여 명이 넘는 이재 동포가 문전걸식으로 연명하는 처지였다. 게다가 수해와 역병 등으로 삶터를 잃은 사람들도 해마다 증가했다.
집 없는 부민들의 일상은 참담했다. 죽기 살기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역전이나 시장,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았다. 이도 저도 형편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음식을 빌어먹으며 허기를 채웠다.
해가 진 이후에는 역전이나 공회당 주변 외에도 길거리나 천막, 동굴에서 잠을 청하기 일쑤였다. 해방 이듬해 겨울을 앞두고 나온 당국의 대책은 되레 노숙자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땅을 파고 널빤지로 구성하는 움집을 늘리겠다는 발표였다. 이는 토막촌과 다름없었다. 이재민 구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적산가옥을 둘러싸고 추잡한 쟁탈전이 전개되고 있다. 즉 해방 직후 부내 서문동 2가 37번지에 거주하던 일인 중촌의 집은 그가 사망한 후 전기 가옥을 그 집 점원 교본이라는 자가 도학 박봉근 양인에게 이중매매를 하였는데 전기 일인에게 먼저 매수한 박도학은 재작년 9월 13일 자기명의로 임대차 계약을 하고 거주해왔는데~ 이에 관련이 있는지 적산관리처장 정진채 씨까지 가택수색을 당하는 등 그 추이가 주목되고 있다.~' (남선경제신문 1948년 10월 1일 자)
해방되던 그해 겨울, 대구에서는 귀향 전재민 동맹이 만들어졌다. 이재민들의 생활 대책을 도울 목적이었다. 일상생활에 힘을 보태고 직업지도 등도 벌였다. 구제금을 모아 이재민들을 도우려는 움직임도 활발했다. 대구지역 시민단체의 사회적 활동 역량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활동에도 이재민들의 주택공급에는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
애초 적산은 미군정에서 처리를 맡았다가 이양되었다. 적산가옥을 개방하고 보급하겠다는 논의는 무성했지만 그때뿐이었다. 모리배의 사리사욕에다 당국의 정책 의지가 실종된 결과였다.
적산가옥을 차지하려는 추잡한 쟁탈전은 어디서나 벌어졌다. 대구에서도 이중매매 등 적산가옥을 둘러싼 말썽이 수시로 불거졌다. 심지어 대구부 적산관리 처장이 가택수색을 당할 정도로 적산관리 담당자가 이권에 개입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대구 부내에 있는 적산가옥 4천여 호 가운데 이재민에게 넘겨진 것은 800호 정도에 불과했다.
나머지 약 8할의 가옥은 대구 토착민 중 부유한 사람들이 차지했거나 이중매매로 넘어간 상태였다. 이들은 방을 구하는 이재민에게 수만 원의 전세를 요구했다. 일부는 거액의 권리금을 받고 집을 팔았다.
엄동설한에 한뎃잠을 자는 사람들의 고통은 쉽사리 해결되지 않았다. 고국에 돌아온 동포나 재해를 당한 이재민 다 마찬가지였다. 국민을 제때 구제하지 않는 당국에 실망하고 분노했다. 아무리 용을 써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각자도생이 기다릴 뿐이었다.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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