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칼럼] 한국 정치가 발전하는 경우의 수

이상헌 뉴스국 부국장
이상헌 뉴스국 부국장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2차전 응원을 핑계로 대학 동기들을 모처럼 만났다. 하지만 전반전에만 두 골을 내주면서 흥이 식은 송년회는 예상보다 일찍 끝났다. 겨울비를 맞으며 택시를 기다리던 우리는 서글픈 마음으로 16강 진출 경우의 수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졌잘싸'였던 가나와의 경기는 결과적으로 엄청난 복선(伏線)이었다. 가능성이 10% 남짓하다는 데이터 업체들의 예측을 비웃기라도 하듯 태극 전사들은 강호 포르투갈을 제물 삼아 기어이 16강에 올랐다. '알라이얀의 기적'이 감동 그 자체였던 이유 중 하나이다.

스포츠 경기에서 선전은 이처럼 잠시나마 국민을 '진영'이 아닌 '팀 코리아'로 묶어준다. 꿈쩍 않던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조차 반등세를 보인다. 더욱이 저물어가는 2022년은 팬데믹의 지속, 경기 침체, 산불·수해 및 이태원 참사 등으로 유난히 힘든 한 해였다.

문득 어리석은 생각이 든다. '1차전 뒤 16강 적신호, 2차전 뒤 경우의 수, 3차전 뒤 유종의 미'를 반복하곤 했던 우리 축구가 성장한 것처럼 정치가 발전할 가능성은 정녕 없을까?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란 자세로 줄곧 내 편에게 투표만 하면 되는 걸까?

정치 양극화로 인한 사회 갈등은 가늠조차 못 할 사회적 비용을 야기하고 있다. 상대를 무릎 꿇리는 데만 몰두하는 거대 정당들의 이전투구에 진절머리가 난다는 이가 많다. "대통령의 존재 자체가 사회적 위협"이란 야당 의원의 독설은 민주주의에 회의를 갖게 한다.

축구에는 룰이 있어서 비신사적 행위에는 징계가 내려진다. 월드컵 16강 경우의 수에는 각 팀의 경고·퇴장 숫자를 따지는 '페어플레이 점수' 규정도 있다. 이를 우리 정치판에 적용한다면 정치 선진국 도약은커녕 선발 선수 명단조차 짜지 못할 지경일 것이다.

늘 '희망 고문'에 그치기 일쑤였지만 경우의 수를 억지로라도 만들어야 돌파구가 생긴다. 중대선거구제, 석패율제를 도입해 사실상의 양당제를 막고 다당제를 뿌리내려야 한다. 마침 전국 선거가 없는 내년은 국민 통합을 목표로 선거제도 개혁에 나설 좋은 기회다.

하지만 총선을 앞둔 여야는 여전히 당리당략만 따지고 있다. 작년 4월 재·보선에 이은 올해 대선과 지방선거 3연승 기세를 홀라당 날려 먹은 국민의힘에선 전당대회 경선 규칙 변경이 최대 화두다. 표를 줄 '심판'인 유권자는 대놓고 무시하는 모양새다.

더불어민주당에선 당 대표의 사법 리스크를 두고 계파 간 대립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모두 총선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하지만 이재명 대표의 혐의가 총선 이전에 정리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 여당은 내심 여대야소 역전까지 꿈꾼다.

선거에서 이기려면 중도층 민심을 움직여야 한다는 건 상식이다.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에 빠진 채 팬덤에만 기대어선 이룰 수 없는 노릇이다. 자파(自派) 지지자들이나 좋아할 '청담동 술집' '빈곤 포르노' 같은 가짜 뉴스와의 협업으로는 불가능하다.

이제는 정치 룰을 바꿔 탄식과 눈물 대신 기적과 감동을 연출해야 한다. 선거제도 개혁을 통한 다당제 전환은 증오의 정치 악순환을 멈추게 할 '빌드업'이다. 대통령제와 사실상의 양당 체제가 결합하면서 초래한 이 답답한 승자독식 악몽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