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쓰는 사람들과 허름한 술집에 모여 소설 쓰는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들을 늘어놓으며 열을 올리는데, 가만히 듣고 있던 소설가 하나가 말했다. "모두 죽은 연인을 그리워하며 남은 여자가 회상하는 형식이네요." 정말 그랬다. 말하려던 작품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것 또한 정확하게 그런 식이었다.
'그리운 흘긴 눈'은 서른을 눈앞에 둔 '채선'이 들려주는 이야기로, 현진건 선생님의 작품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다. 열아홉의 채선은 '화류계에서는 그래도 이름 있는, 호강도 웬만히 해보고 귀염도 남부럽잖게 받은' 기생인데, 노는 것도 고되어 그 노릇도 딱 하기 싫던 차에 '귀공자답게 얼굴도 곱상스럽고 돈도 잘 쓰며 노는 폼도 재미스럽고 호귀로운' 그가 나타난다. 같이 살자는 그를 바싹 달게 해서 돈을 챙긴 뒤에 살림을 차린다. 그러나 물 쓰듯 채선에게 돈을 갖다 바치는 아들을 보다 못한 부친이 돈줄을 끊자, 어리고 참된 도련님은 절망에 빠진다. 그를 따라 죽겠다는 여자의 말에 감동한 남자가 동반자살을 결심하고, 채선이 약을 먹는 모습을 본 그도 이어 약을 삼킨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자신 때문에 여인을 죽게 할 수는 없었던 남자는 송장이나 다름없는 손으로 채선이 삼킨 알약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여자는 처음부터 죽을 마음이 없었고 애초에 알약을 삼키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설에서 채선은 이렇게 묻는다. '물론 나는 그를 죽을 때까지 속인 고약하고 몹쓸 년이지만, 내게 뱉으라고 말하며 약을 돌려내려고 입에 손까지 넣을 정도로 거룩한 사랑을 가진 그이였느니, 약을 삼키지 않은 걸 알았으면 기뻐해야 옳을 일 아니에요? 그렇게 성을 내고 나를 흘길 일이 무엇이에요?' 과연 채선의 말은 틀리지 않는다. 그런데 남자는 왜 그랬을까?
남자에게 여자는 '죽어도 좋은 사랑'이었으나 여자에게 남자는 그저 '사는데 필요한 도구'였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채선과 죽을 수 있었던 이유도 그녀를 살려야 했던 이유도 남자에겐 모두 '사랑'이었는데, 여자의 말과 마음은 전부 거짓이었다. 그리하여 죽어가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원망과 분노를 가득 담아 눈을 흘기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채선이 그를 상기하며 내뱉는 마지막 독백에 있다.
'내 그른 것은 어찌 됐든지 그때에는 그이가 야속한 듯싶었어요. 야속하다느니보담 의외였어요. 그런데 시방 와서는 그 흘긴 눈이 떠오를 적마다 몸서리가 치면서도 어째 정다운 생각이 들어요. 그리운 생각이 들어요.'
이보다 더 절절한 고백이 있을까. 시작은 사랑이 아니었을지라도 결국엔 사랑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채선에게 스며든 남자는 '미친 눈깔같이 핏발을 세워 나를 흘긴' 그 눈마저 여자를 몸서리치게 정답고 그립게 만들었다. 그것은 어리석은 애인을 벌하는 남자의 낭만적 복수이자, 남자의 사랑에 보내는 여자의 뒤늦은 응답이다. 그들의 사랑은 서로에게 도착하는 시간이 너무 달랐다.
나는 오래전 이 소설을 읽은 뒤부터 '그리운 흘긴 눈'이라는 가게를 열고 싶은 소망이 생겼다. 현진건 선생님의 생가터인 현대백화점과 계산 성당 그 어디쯤이면 좋겠다. 펍이든, 살롱이든, 카페든 상관없다. 나자르 본주 같은 푸른 눈동자가 그려진 간판을 내걸고, 찾아오는 사람들과 슬픈 사랑 얘기나 나누면서, 눈 흘기지 말고 순하게 나이 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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