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그립습니다] 신문광(서양화가) 씨의 아버지 고 신판쇄, 어머니 고 공청자 씨

"태산 같은 부모님 그늘…오늘의 행복, 저절로 오지 않았다는 것 이제 알 듯합니다"

아버지 신판쇄와 엄마 공청자의 정다운 한 때 모습. 가족 제공.
아버지 신판쇄와 엄마 공청자의 정다운 한 때 모습. 가족 제공.

세월이 흐르면 세상 모든 것이 변하게 되고 세월 따라 사람도 모두 흘러가고 없지만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마음속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때로는 아련한 기억이 오히려 나를 되돌아보게 하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일깨워 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살아오면서 부모님과의 사소한 기억들이 나를 행복하고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내가 여고생이었을 즈음 삼덕동 근처 주택에 살고 있었습니다. 자정이 다 된 늦은 밤이면 가끔 아버지가 술 한 잔 드시고 늦은 귀가를 하시며 저 멀리 골목 밖 큰 길에서부터 큰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잠든 사람들을 다 깨우고도 남을 큰 목소리로 내 이름을 외쳐 부르니 나는 동네 창피한 생각이 들어 화부터 났지만 엄마는 자꾸 날더러 어서 조용히 아버지 모시고 들어오라고 내보냈지요.

어둡고 얼어붙은 추운 겨울밤에 하는수 없이 골목 밖을 나가 보면 아버지는 또 숨바꼭질 하듯 담벼락 뒤에 숨어 놀자고 하십니다. 한참 뒤에 억지로 모시고 집에 들어오면 우리 큰딸이 마중 나왔다고 마냥 떠들썩하니 좋아 하셨지만 나는 그저 이웃으로 퍼지는 큰 소리에 마음이 쓰여 화를 내며 조용히 하려고만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기분이 좋아진 아버지는 잠이 드실 때까지 식구들을 다 모여 앉으라 하고 노래를 부르도록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성화에 붙들린 노래 담당은 나중에 성악과를 전공하게 된 바로 내 아래 동생이였습니다. 아무튼 아닌 밤중에 가족노래자랑이 열리게 되어 차례로 노래를 하게 되었고 긴 겨울밤은 그렇게 깊어져 갔습니다.

큰 목소리로 기분좋게 노래 부르던 아버지는 일본 가수 미소라 히바리를 좋아 하셨고 이미자 노래를 잘 부르던 엄마의 고운 목소리도 잊을 수 없으며 동생의 노래, 새타령은 지금까지 우리 다섯 자매가 모이면 즐거운 추억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부모님 산소에 모였을 때 이제 목소리 들어 볼 사람은 너 뿐이니 새타령 한번 들어 보자 하였더니 절대 안 합니다. 나처럼 가슴이 조마조마하고 괜히 마음이 편치 않아 슬며시 화도 나고 노래하기가 싫었던 것은 동생도 마찬가지였나 싶었습니다.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이었습니다. 잔소리 한마디 안하고 밤새 조용히 아버지 시중들던 엄마 마음도, 술을 한 잔씩 하셨던 편치 않았을 아버지의 그 시절 근심도, 큰딸이라고 그리 예뻐하셨던 그 사랑도, 또한 동생들 속마음까지도, 그때는 하나도 몰랐습니다. 이제 사진으로만 뵙는 아버지와 엄마는 그 시절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무엇이 더 소중한지 깜깜하게 모른 채로 살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사진 속 부모님 모습을 보면 참 평화롭게 보이고 그 모습은 그대로 나의 삶이 되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다시 되돌아 갈 수 없어 더 그립지만 지금 이렇게 같은 추억을 안고 살아가는 동생들이 있어 함께 흉보며 편하게 웃을 수 있으니 너무 좋습니다.

태산 같은 부모님의 큰 그늘 속에서 평생을 살아오면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평온함과 행복이 저절로 오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야 알 듯 하니 그 시절이 더 그리워집니다. 동생들도 지금은 떨어져 살고 있으며 이제 우리들도 부모님의 젊으셨던 그때 나이를 넘어서 있습니다. 가끔씩 예전의 그 겨울밤처럼 다시 한 번 노래자랑 해 볼 수 있을까 하며 웃곤 합니다.

흘러 가버린 50년 세월의 뒤편에는 태산 같았던 부모님의 사랑이 아랫목에 따뜻하게 묻혀 아직까지 마음에 전해지고 그 겨울밤은 풍경화가 되어 그대로 기억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 풍경 속에는 골목길 밖에서부터 고래고래 소리높여 내 이름을 부르시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녹음되어 담겨 있어서 자꾸 눈물이 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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