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수요일 아침] 대구 10월 사건의 진상 조속히 규명해야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발생한 10월 사건은 시민의 생명이 희생된 엄청난 참극이다. 그러함에도 대구 시민 중 이 사건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드물다. 해방 이듬해 발생한 이 사건은 '폭동'과 '항쟁' 사이를 아직도 오가고 있다. 1948년 제주 4·3과 여순 사건은 벌써 그 성격이 규명되어 보상까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대구의 10월 사건은 사건 발생 70여 년이 지났지만 진상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누구 하나 앞장서 이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은 결과이다. 이 지역의 '매일신문'이 10월 1일을 전후해 특집을 통해 10월 사건을 재조명하였다. 늦었지만 무척 다행한 일이며 지방 언론이 대단한 역할을 하였다. 유족 등이 관심을 가졌던 대구의 10월 사건의 진실은 보다 철저히 규명되어야 한다.

대구의 10월 사건은 역사학계에서도 그 진상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있다. 억울한 피해자의 가족까지 연좌제에 묶여 그 사실 자체를 발설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부 지식인만이 관심을 가졌던 10월 항쟁의 실체적 진실은 아직 반쯤도 규명되지 않았다. 당시 시위대는 '쌀을 달라' '친일 경찰 처단하라'는 급박한 구호로 시위를 시작하였다. 대구의 지식인, 노동자, 농민, 학생 등 일반 시민들이 합세한 시위는 결국 관민 충돌로 이어졌다. 미군정은 좌익의 선동에 의한 단순한 '식량 폭동'이라고 계엄령부터 선포하였다. 시위는 그해 말 영천, 청도, 칠곡, 선산, 달성 등 22곳으로 퍼지고, 급기야 경남, 충북, 경기 등 전국 73개 시·군으로 확산되었다. 당시 대구경북 인구 317만 명의 24%인 연인원 77만3천 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당시 7천500여 명이 검거돼 1천여 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30여 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 역시 문서상의 기록일 뿐 사건의 진상은 여전히 가려져 있다.

불행히도 대구의 10월 사건은 그 후 6·25 전야의 보도연맹 사건과 결부돼 여러 곳에서 수많은 양민 학살로 이어졌다. 사건 관련자들은 대구의 가창골, 청도 곰티재, 경산 코발트 광산, 영천 절골 등에서 재판 절차도 없이 처형되었다. 심지어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는 진보적 인사들까지 즉결 처분되었다. 희생자 가족들은 연좌제 때문에 사실을 숨기고 살았으며 취업도 결혼도 못 한 사람이 상당수에 이른다. 그간 엄격한 반공 정책과 대구 지역 특유의 보수적 풍토는 이 10월 사건을 역사의 뒤안길로 밀쳐 버렸다. 지난 10월 초 '매일신문'의 10월 사건 특집은 이 사건을 세상으로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10월 사건 피해자 가족들의 피 맺힌 절규는 우리의 가슴을 무척 아리게 하였다. 이는 지방 언론의 대담한 기획이며 언론의 공기(公器) 역할에 충실한 결과이다. 이를 계기로 정부의 철저한 조사와 학계의 후속 연구를 기대해 본다.

대구와 영천에는 늦게나마 희생자들의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일부 유족과 관련 단체의 추모 행사가 추진되었지만 사건의 진실은 여전히 어둠에 싸여 있다. 아직까지 시신도 찾지 못한 가족이 많지만 이를 발설조차 못 했던 비극이 있었다. 하루빨리 진상이 규명되어 남은 가족의 한이라도 풀 수 있어야 한다. 사건의 진실이 제대로 밝혀져야 이에 대한 역사의 평가도 가능하다. 이 사건이 좌익들의 폭동이 아니라 당시 민생고를 호소한 민중들의 집단 항쟁이라는 것이 거의 명백하다. 물론 당시 경찰 등 공권력의 피해 상황도 공정하게 밝혀져야 한다. 연좌제가 폐지되고 민주화 공간이 이처럼 넓어진 이 시점에서 국가 공권력에 의한 피해는 더욱 철저히 소명되어야 한다. 대구의 참극이 묻어만 둔다고 치유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대구의 10월 사건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진실 규명에 나서야 한다. 대구 10월 항쟁 유족회 등 민간 유족회의 활동만으로는 역사의 진실을 밝힐 수 없다. 이 지역에서 10월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범시민 대책 기구 설치를 제안한다. 그것이 대구의 왜곡된 10월 항쟁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길이다. 대구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여러 갈래의 항일 독립운동 중심지였으며, 그 정신이 대구 2·28민주운동으로 이어졌다. 향후 대구 10월 사건의 진상을 보다 명백히 밝히는 것은 대구 시민의 자존심을 살리는 길이다. 방치된 대구의 10월 역사를 되살리는 것이 시대적 긴급 과제이며 시민의 올바른 책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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