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겨울 사이, 땀과 눈물로 뒤범벅이 된 먹물을 갈며 뜨거운 예술혼을 불태워 왔던 한 서예가가 난데없이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아마도 하늘나라에서 정자 한 채를 새로 지었는데, 그 현판 글씨를 쓸 사람이 없어서 선녀들을 내려보내 꽃가마로 모시고 갔을 게다.
송하(松下) 백영일(白永一)! 그는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작가 정신이 가장 투철한 예술가다. 그가 한 편의 작품을 내놓기 위해서는 봄부터 소쩍새가 울어야 하고, 지루한 폭염과 장대 같은 폭우, 천둥·번개와 대가리 큰 태풍 서너 개를 뚫고 우리나라에 가을이 와야 한다. 그만큼 하나하나의 작품에 오랫동안 영혼을 온통 싸지르면서 치열하고도 진지하게 작품을 창작했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창작 과정에서 즉흥적으로 붓을 휘두르는 법이 없다. 대중화라는 이름 아래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붓을 휘두르는 퍼포먼스 같은 것을 몹시 싫어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송하는 익숙한 것에 안주하지 않고 언제나 새롭게 도전하는 예술가이기도 했다. 그는 중년기에 이미 한문 서예로 명성을 떨쳤고, 특히 예서(隸書)의 경우는 일찍이 그 누구도 그은 적이 없는 새로운 획을 긋고 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한문 전각 분야에서도 일찌감치 자타가 공인하는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그 정도에서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세계를 향한 도약을 부단하게 꿈꿨다. 그가 쓴 한글 작품인 '흰뺨검둥오리가 퍼들껑 물을 박차고 비상할 때' '첫새벽 하늘을 솟는 노고지리' '또 한층 올라섰네, 더욱 멀리 내다뵈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다' 등에는 이와 같은 그의 예술혼이 아주 강렬하게 투영돼 있다.
심지어 송하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모험조차도 마다하지 않았다. 세계에 우뚝하고 세계에서 으뜸가는 한글에 대한 눈물겨운 사랑을 토대로, 한글 서예와 한글 전각(篆刻)을 차원 높은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는 데 마지막 투혼을 불사른 것이 바로 그런 경우다. 한글은 제자 원리가 실용성에 초점을 맞춘 것인 데다 그 획이 지극히 단순해 아무리 노력해도 그 조형적 한계가 자명하다. 송하도 입버릇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고 거듭 탄식을 하면서도 안 되기 때문에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며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하도록 한글을 화두로 몸부림쳤다.
그는 끝내 안 된다고 통탄을 하며 세상을 떠났지만, 안 되는 것이 아니라는 평가가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이 세상을 제일 앞장서 혼자 새 길을 만들어나가는 기분이었다.' 그의 메모장에 이런 글귀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도 내심 이제야 무언가 되어간다는 벅찬 희열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을 게다.
송하는 꼭 이루고 싶었던 두 가지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동안 완성된 한글 전각의 도록을 만들고, '백영일의 우뚝 으뜸 우리 말글전(展)'을 개최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요컨대 한글 서예와 한글 전각으로 한바탕 큰 잔치를 벌일까 했는데, 새로 지은 정자의 현판 글씨 때문에 안타깝게도 하늘나라로 불려가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현판 글씨도 어지간히 완성되었을 테니, 마지막 꿈이라도 이룬 뒤에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도록 제발 송하를 돌려보내주면 좋겠는데,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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